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피살,..
오늘이 을미사변 발생 117년 되는날 잊지말고 기억하자,..
끝까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조선 국모 명성황후 참혹하게 학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발생일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하려 했고, 조선 측에서도 흥선대원군,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개화파 문신 유길준, 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具然壽) 등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 지도자들이 내통, 협조했다.
일본을 출발해 인천 제물포 항구에 나타난 일본인 낭인들은 조선인 군관들의 경호와 길안내로 경복궁까지 3시간 내에 진입했다. 홍계훈이 이끄는 근위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나타난 이들은 궁녀 복장을 한 왕비를 찾아내 사살한 뒤,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에서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졌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 불렀다. 일본놈들은 여우사냥이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다. 명성황후는 사진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사건가담자들
당사자들
명성황후 - 조선 국왕 고종의 왕후, 피살자
홍계훈 - 명성황후의 측근, 근위대 장수, 일본 낭인의 총격에 사살됨
이경직 - 궁내부 대신, 히라야마 이와히코의 칼에 맞아 죽음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 - 낭인 지도자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 일본군 육군 소좌,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 일본인 영사관보, 낭인들의 길 안내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 - 주조선 공사관 무관, 일본육군 포병 중좌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 秀次郎) - 영사관 순사들을 지휘
이노우에 가오루 - 일본인 낭인 지휘자
미우라 고로 - 일본인 낭인 지휘자
사건 가담자들
아다치 겐조 - 일본 낭인의 길안내인의 한사람,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 사장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 재조선 취재기자, 낭인에 가담하여 내부대신 이경직 살해에 주동적 역할
간접 당사자
이범진 - 사건을 고종 황제에 알림
세레딘 사바틴(러시아어: Середин-Cабатин, 사파진(士巴津), 흔히 사바틴) - 러시아인 건축기사, 현장 목격자
다이(W. M. Dye) - 미국인, 조선인 근위대 교관, 현장 목격자
이름 미상의 프랑스인 외교관 - 현장 목격자
고종 - 명성황후의 남편
황태자 척 - 명성황후의 아들
흥친왕 - 흥선대원군의 장자이며 조선인 협력자 이준용의 아버지
윤치호 - 첩보를 입수, 사건을 예견한 인물
김홍집 - 사건 직후 새 내각을 주도한 인물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의병 봉기의 계기로 여긴다.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이 사건을 기회로 한국의 개화파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사건의 주요 가담자의 한사람인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은 후에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 고영근에 의해 암살된다.
대원군의 가담 여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억측이나 누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바뀌었다. 1990년대 초 대원군의 가담 의혹이 제기되었다.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을 조선인 최고위 협력자로 지목한 것이 알려지게 됐다.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황현의 매천야록 등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협력자로 지목되었다.
사건을 조명함에 있어 조선인 협력자들의 존재 역시 간과하기 힘들다. 흥선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를 두고 여러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대원군을 암살 배후로 지목한 유길준 역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로 지목됐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대에도 조선인 협력자들의 이름이 지목되었으나, 유길준은 피신했도 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이니 처벌할수 없었으며, 처벌은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전 군부차관 이주회 선에서 종결되었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암투가 빚어낸 참극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명성황후가 비참하고 굴욕적인 최후를 마쳤다는 것은 단지 일제 낭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하나의 인간으로서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만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에조(英臟) 보고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제 낭인패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다. 에조 보고서는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 1905∼1977)에 의해 최초로 알려짐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윤간(輪姦)'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것을 2002년에 소설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냈고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무려 107년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 ‘여우사냥’의 주모자인 미우라 공사 몰래 상관인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김진명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에조 보고서를 소개한 글.
'이 사건의 실행자는 훈련대 이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다. 구마모토(熊本) 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여 그들 중에 신문기자 몇명 또한 의사, 상인도 있었다. 따라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특히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이끌어내고 두 세군데 칼질을 저질러 (상처를 입히고나서)나체로 하고 국부검사(말은 검사지만 실제로는 강간)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세 시간 여를 소비하여 위막된 짓을 저지른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유유히 광화문 (왕성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나갔다. 그 때가 벌서 8시쯤이 지나고 왕성 앞에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도 충격적이다. 이 내용을 옮겨쓰는 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인간의 탈만 썼을 뿐 저들 살인귀 앞에선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것이다.
죽은 사람을 범하는 것을 시간(屍姦)이라 한다. 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