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뭐야?

"한일합방 무효 선언…새 한일관계 나설때”

22day 2010. 5. 7. 18:25

[일제 강점 100년]“한일합방 무효 선언…새 한일관계 나설때” 역사/문화/예술

2010/01/0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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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도 안된 을사조약 문서…‘불법 국권탈취’ 확인



[한겨레] [일제 강점 100년] 4개 조약 원본 검증 결과

위임→체결→비준거친 외교기록 없고

원본 첫칸이 빈칸, 조약 공식이름 빠져

역사학계 “국권 강탈조약 위법성 방증”


때는 1905년 늦가을이었다.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8일 대한제국 정부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기 위해 부산을 통해 입국했다. 9일 밤 특별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한 이토는 손탁호텔(지금의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터)에 여장을 풀었다. 이토는 이튿날인 10일 낮 12시30분 걸어서 5분 거리의 경운궁(덕수궁)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으로 찾아가 고종 황제를 알현한 뒤 “(을사조약은) 일본 정부의 확정된 의결사항이므로 결단코 변경할 수 없다. 거부할 경우에는 (중략)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고종은 “외교의 형식만이라도 유지하게 해 달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4년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뺏기 위해 맺은 을사조약, 병합조약 등은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일까. 그동안 일본 정부는 “한일합방은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지켜온 데 견줘, 한국에서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국권 침탈’ 조약은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이뤄졌으므로 당연히 무효”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한겨레>는 한국 쪽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이상찬 서울대 교수(국사학)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현재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한일의정서’, ‘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3차 한일협약’(정미조약), ‘병합조약’ 등 4개 조약의 원본을 살펴봤다. 이 4개 조약 모두 국가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 외교문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대표자에 대한 권한 위임’→‘조약 체결’→‘비준’으로 이어지는 절차를 거쳤다는 원본 문서가 확인되지 않았다.(표)


가장 큰 결함은 을사조약에서 발견된다. 15일 다시 고종을 알현한 뒤에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토는 이튿날부터 하야시 곤스케 공사와 함께 대한제국 각료들을 대상으로 회유 작업에 돌입한다. 이토와 하야시는 이틀 동안 손탁호텔과 일본공사관 등으로 대한제국 대신들을 불러 모아 설득한 뒤 17일 오후 강제로 입궐시켜 어전회의를 강요했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열린 회의에서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들이 다시 거부 방침을 밝히자, 하야시는 급히 이토의 입궁을 요청한다. 이토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 사령관(2대 조선 총독) 등을 대동하고 수옥헌으로 들어섰다.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경운궁 주변을 빽빽이 둘러싼 뒤였다. 당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토와 하세가와의 마차 탄 사진이 <경성부사>(1936)(사진)에 실려 오늘에 이른다.

을사조약은 이토의 끈질긴 회유에 분노한 한규설 참정대신(총리대신)이 졸도하는 진통 끝에 하루를 꼬박 넘긴 18일 새벽 2시 체결됐다. 당시 <황성신문>과 <차이나 가제트> 등 외신들은 이토가 이완용·권중현·이근택·이지용·박제순 등 대신들을 일일이 지목해 가부를 물은 뒤 “다섯이 찬성했으면 조약은 성립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박제순 외부대신의 도장을 무단으로 가져와 조약에 날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원본은 한국어본, 일본어본 모두 제목에 해당하는 제일 첫 칸이 빈칸으로 처리돼 있었다. 우리가 ‘을사조약’ 또는 ‘2차 한일협약’으로 부르는 이 협정은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약들의 일본어본은 조약이 완성된 뒤 문서 변경을 막기 위해 찍는 ‘봉인’이 확인되지만, 을사조약에서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찬 서울대 교수는 “이는 조약이 사실상 완결되지 않았음을 일본인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고종이 헤이그 밀사 등을 통해 일관되게 밝힌 ‘을사조약은 합법적으로 체결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증거”라고 말했다.(자료사진 )

당시 조약 체결에 관한 국내법을 검토해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당시 헌법인 ‘대한제국국제’(1901년 제정)는 “황제가 모든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을 가지며, 하위 법률인 ‘의정부 관제 규칙’(1904년 3월)과 ‘중추원 관제 규칙’(1905년 10월) 등은 ‘조약은 의정부 회의(지금의 국무회의)와 중추원(국가 원로들의 심의기관) 심의를 거쳐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런 국내법적 조처를 따랐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위법과 결함투성인 국권 강탈조약을 강제했다. 한일병합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았고, 또 이에 따라 행해진 일제의 식민지배는 처음부터 불법이었다는 게 우리 쪽의 일관된 견해”라고 말했다.

 

“한일합방 무효 선언…새 한일관계 나설때”

“국가주의 극복위해 교육방법 공동개발 필요”



[한겨레] [일제 강점 100년] 한·일 전문가 56명 설문조사

“식민지배 보상 부족, 원폭피해 조속 해결” 공감

올 하토야마 담화 ‘전향적 해법’ 기대 어려워

‘일왕 방한’ 한국선 조건부 찬성…일본선 반대


올해는 대한제국(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한겨레>와 한국의 ‘국치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위원회)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 활동해 온 한·일 두나라의 진보적인 학자, 변호사, 시민단체 활동가 등에게 새로운 100년을 위해 한·일 두 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양국에서 각각 선정한 50명의 전문가에게 이메일 설문지를 보내, 12월20일부터 열흘간 회신을 보내온 한국 30명, 일본 26명의 전문가 답변을 대상으로 분석을 진행했다. 전문가 설문 결과는 일반시민의 정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100년을 위한 바람직한 모범답안을 그려봤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전문가들이 답변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갈렸다. 한-일 간의 해묵은 과거사 현안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두고서는 한국과 일본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했지만, 일부 현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100년을 위해 한·일 양국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두 나라의 역사인식을 좁힐 수 있는 다면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쪽으로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일치하는 의견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일본이 한국에 입힌 크고 작은 식민지배 피해와 관련해, 그동안 일본 정부가 보여 준 사과와 보상에 대해서는 두 나라 전문가 모두 ‘부족했다’고 의견이 일치했다. 오히려 한국 쪽에서 ‘보통이다’(1명), ‘부족한 편이다’(2명) 등의 소수 의견이 있었지만, 일본 쪽에서는 설문 참가자 전원(26명·100%)이 ‘부족했다’고 답했다. 올해 하토야마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담화를 내놓아야 하고, 그 안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의지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담겨야 한다는 데도 한국(28명·93%)·일본(24명·92%) 전문가들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조선인 B·C급 전범, 원폭 피해자, 사할린 억류자 등 해묵은 현안을 놓고서도 ‘고령의 피해자들을 고려해 일본 정부가 하루빨리 새로운 법을 만들어 사과·보상을 해야 한다’고 같은 의견을 내놨다. 또 1923년 일본 도쿄 주변의 간토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이후 진행된 대규모 조선인 학살사건, 2002년 9월 ‘북-일 평양선언’ 이후 답보 상태에 빠진 북-일 국교정상화, 재일동포들의 지방참정권 부여 등 미묘한 현안에 대해서도 한·일 전문가들의 생각은 대체로 일치했다.(표 참조)

새로운 100년을 맞아 한국·일본 시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묻는 주관식 질문에는 거의 대다수의 의견이 “편협한 자국 중심의 국가주의를 버려야 한다”, “서로를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공통의 역사인식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인은) 불편하더라도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동아시아 시민들을 위한 공통의 역사 교육방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도쓰카 에쓰로 류코쿠대학 법학대학원 교수는 “편협한 국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교육 방법을 공동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묘하게 엇갈린 문제들

엇갈린 지점도 있었다. 올해엔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과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수준의 ‘하토야마 담화’가 나오리라는 기대감이 높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에서는 하토야마 정부가 올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현안으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22명·73%)을 꼽았지만, 일본에서는 현재 미-일 간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문제 해결’(10명·38.4%)을 지적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실업과 경기 침체’(6명·23%) 등 국내 문제 해결을 지적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 일본인 전문가들은 하토야마 정부가 정치자금 문제와 경기 침체 등의 영향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기대했던 역사적인 담화를 내놓지 못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하토야마 정부가 한국이 기대하는 만큼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 해법을 내놓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부분이다.

일본이 과거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으로는, 한국 전문가들이 ‘일본의 진정성 있는 태도 부족’(21명·70%)을 꼽은 데 견줘,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의 무관심’(14명·35%·중복 답변 허용)과 ‘일본의 진정성 있는 태도 부족’(14명·35%)이 똑같이 나왔다. 잘못된 과거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의 역사 교육’을 문제 삼는 의견도 많았다. 일부 일본 쪽 인사는 “일본인들은 수치심을 배워야 한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천황제’와 관련한 질문에는, 일본 쪽에서 오히려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답변을 쏟아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전격적으로 해결한다면 일왕이 방한할 수도 있다는 ‘조건부 찬성 또는 조건부 반대’(15명·50%) 의견이 많았다. 이에 견줘 일본에서는 설문 응답자들의 진보적 성향을 반영한 듯 ‘반대’(16명·61.5%)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부 일본인들은 ‘천황제 폐지’, ‘천황이 실질적인 외교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또 일본 민주당이 야스쿠니 신사 문제의 해법으로 내놓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국립추도시설 설치’에 대해, 한국 쪽 응답자들은 ‘A급 전범’과 ‘조선인·대만인의 합사 철회’ 등을 추가로 요구(13명·43.3%)했지만, 일본 쪽 응답자들은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는 존재 자체가 문제’(13명·46.4%·중복 답변 허용)라는 의견을 내놨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쪽 응답자들이 ‘일본 정부는 교과서, 방위백서 등에서 독도를 삭제하는 등의 적극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15명·50%)고 주장한 데 견줘, 일본에서는 ‘독도를 양국이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10명·38.4%)는 응답을 가장 많이 내놓았다.

“괜찮은 대안 내놓을 때까지 일본에 요구하라”


                                      “일본 과거사 반성해야 동아시아 공존”
[한겨레] ‘한일병합 불성립론’ 화두 던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일본은 지난 100년 동안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켜 혼자 사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 선택으로는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태진(67·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8년 전인 1992년 5월, 을사조약·병합조약 등 이른바 ‘국권 침탈’ 조약들이 불법적으로 체결됐다는 주장을 공식화해 한·일 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낳았다. 그의 논지를 한 마디로 줄이면 “1904~10년 대한제국과 일제가 맺은 국권 침탈조약들은 너무나 많은 결함과 불법성을 갖고 있어 도저히 성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한일병합 불성립론’이다. 이 교수의 ‘불성립론’은 “한일병합은 일제의 폭력과 강제에 의해 이뤄진 것이므로 무효”라는 상식 수준의 ‘불법론’을 넘어선 논의로 국사학계 뿐 아니라 국제법 학계까지 토론의 장에 끌어들였다.

찬반논쟁 계속돼 9년간 학술회의만 10번

“대한제국 국권 침탈조약 불법요소 많아”


당연히 일본 학계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 교수의 불성립론을 둘러싸고 98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시사월간지 <세카이>에서 찬반론자들의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일본쪽 반론으로는 ‘고종이 사실은 을사조약을 뒤에서 지시했다’는 하라다 타마키 교수(현립히로시마대학)의 ‘고종 협상 지시설’, ‘을사조약 등에는 위임·비준 등의 절차가 필요없었다’는 운노 휴쿠쥬 명예교수(메이지대학)의 ‘약식 조약론’, ‘국가 대표자에 대한 강박이 아닌 국가에 대한 강박은 유효하다’는 사카모토 시케키 교수(고베대학 대학원)의 ‘국가 강박론’ 등이 나왔다. 이 교수는 “처음엔 찬반론자 모두 모여 토론을 진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반대론자들이 찬성론자들의 반론에 전혀 대응을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둘러싼 한·일간의 논쟁은 한국연구소·하버드-옌칭연구소 등 하버드대학 내 4개 연구소의 이목을 끌었다. 이는 2001년 1월~2009년 4월 무려 열번에 걸친 국제 학술회의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한일병합 뿐 아니라 미국에 의한 하와이 강점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식민지배 전반으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 교수는 “일본이 100년 전 선택한 길로는 앞으로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의 역사는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평화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한다면 정치인이든 학자든 ‘한국 통치가 합법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100년 전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과거청산 첫발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

[한겨레] 재일조선인 북송 연구한 모리스스즈키 교수 방한

“과거사 청산의 첫 걸음은 ‘사과’입니다.”

재일 조선인의 북송 사업에 대한 연구인 <북한행 엑소더스>(2007)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테사 모리스스즈키(59·사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교수(태평양아시아 학부)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지난 1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난 4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동아시아에서 과거사 문제가 확실히 정리되지 못한 것은 역사 청산의 제일 첫걸음인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사과는 누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노력이다. 지난해 2월 케빈 러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지난 세기 폭력적으로 진행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지니’에 대한 동화 정책에 대해 역사적인 사과문을 발표했다. 피해자였던 애버리지니 할머니들을 국회에 불러 놓고, 그 앞에서 눈을 보며 “잘못했다”고 사과한 것이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경험이 100% 완벽했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일본 민주당 정부도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하토야마 총리가 의회에서 피해자들을 불러 놓고, 눈을 보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자세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모리스스즈키 교수가 동아시아 과거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특이한 이력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나 자신도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거주지를 옮긴 국제 이주민자이고, 일본인과 결혼한 마이너리티(소수자)였다”며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식민지의 나쁜 유산이 있는데 일본을 통해 같은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모리스스즈키 교수가 천착한 것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북송 사업’이었다. 그는 50년 만에 기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를 연구해 “이 사업은 좌파적 색채를 가진 ‘골칫덩이’들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에서 몰아내기 위해 일본 정부가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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