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타오른 불꽃
‘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별명이었다. 1946년 10월의 민중봉기부터 대구 경북 지역의 좌익세는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한바탕 싹쓸이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 분위기는 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거니와 대구는 어디에 내놔도 그 반골 기질이 뒤지지 않는 고장이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하필이면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가서 급서하자 이승만에 반대하던 많은 국민들은 실의에 찼다. 신익희도 호남선에서 배를 쥐고 쓰러졌고 조봉암은 이승만이 죽여 버렸다. 그나마 야당의 거목이라 할 조병옥마저 저렇게 됐으니 어쩌면 이승만 박사란 양반은 어쩌면 운이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전직 가카를 우러러 그렇게 말하듯이. 그런데 희망은 작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여든을 넘었으니 아니할말로 어느 날 화장실 가다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통령에라도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다면 그래도 위안이 될 터였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치를 정권이 깨닫지 않을 리도 만무. 그들은 막대한 부정선거는 물론 치졸한 선거 개입에 나선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시내 고교들에 일제히 등교령이 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많았던 섬유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출근령이 전달됐다.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전날 토요일에 급작스럽게 단축수업을 실시하거나 조기퇴근을 시키더니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토요일은 자유당 대구 유세였고 일요일은 민주당 대구 유세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 유세장에 갈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놓으려는 정권의 얄팍한 술책.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는 찌질함의 극치는 그때의 이 대통령 정권도 마찬가지로 발휘했다.
경북고등학교는 갑자기 시험을 앞당겼고 대구상고에서는 난데없는 졸업식 송별회 연습이 거행됐다. 대구여고에서는 어설픈 무용대회가 펼쳐졌고 별안간 떨어진 소집령에 학생들이 반발하자 그럼 영화라도 보자고 애걸하는 곳도 있었다. 어떤 경북고등학교 재학생의 추억에 따르면 영화 단체 관람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서 영화 <철도원> (추억의 이탈리아 명화)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가운데 으뜸은 대구고등학교였다.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유달리 자연친화적이었던지 이 날 ‘토끼사냥’을 핑계로 제자들을 불러냈다. 몽둥이 하나씩 들고 산자락을 뛰어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한 정권의 행동에 학생들은 불똥이 튄 듯 분노한다. 이기 뭐고?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 손진흥 등 대구 시내 학교 대표 7-8명이 이대우 학생의 집에 모였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 않은 ‘고딩’들. 그러나 그들의 각오는 사뭇 비장했다. “이거 하고 나면 우리는 퇴학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낀데 감옥 갔다 와서 취직은 우예 하고 뭐하고 먹고 사노.” 그러던 그들은 뜻밖의 노래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유정천리’. (대구일보 김풍삼 고문 증언) “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즉 감옥도 가고 취직도 안되고 인생 조질 거 같으면 까짓거 두메 산골에 들어가 감자라도 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경상도 특유의 확인 구호도 있었으리라. “댔나?” “댔다!”
다음날 손진흥은 진창밭이 된 길을 자전거를 낑낑거리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시위 결정을 재확인했다. 교사들의 만류가 완강해 시위가 무산된 곳도 있었지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 진출에 성공했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선언문 중) 대구 중앙로를 내달리면서 그들은 부르짖었다. “일어서라 동방의 횃불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경찰이 가장 곤욕을 치른 것은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때였다. 경찰은 곤봉을 들었지만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쓰려던 작대기를 쳐들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대구고등학생들을 겨우 진압한 경찰들은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무지하게 욕했을 것이다. “언넘이 토끼사냥 한다 캐가꼬!!!!” 그렇게 2.28 시위가 대구를 진동했다. 이 시위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그 두 달 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시위의 전초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후 반세기 가까이 한국 사회를 진동했던 학생 시위의 시발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한국 ‘청년학도’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린 것은 시대를 고뇌하던 명문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시위는 다른 시위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시민들이 그 시위에 뛰어들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을 여전히 강고해 보였고 학생들은 무더기로 잡혀가고 징계를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정말로 “가련다 떠나련다”를 불러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소해 보이는 불똥들은 이미 바짝 말라 버린 들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불똥들은 3.15 부정선거라는 기름 세례를 받으며 불길로 화했고 불길은 들불로 타올라 이승만으로 하여금 “가련다 떠나련다 프란체스카 손을 잡고~~~”를 부르며 하와이로 가게 만들게 된다. 2월 28일의 대구가 없었으면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고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으면 4월 19일의 서울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 2월 28일의 대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 자격을 갖춘 도시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권력에 저항하던 그 앳된 의지들이 어느 세월엔가 “한 집 건너면 청와대와 연결되는” 환상들로 둔갑했는지. 2.28 데모에 나섰던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우리 나라 현대사를 어떻게 아도를 쳤는지.
그렇게 역사는 가끔 어처구니없는 역설과 황당할이만큼의 역전을 즐긴다. 그래도 2월 28일 ‘유정천리’를 부르며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하겠노라고 종주먹을 내밀고 눈을 빛내던 까까머리 검은 교복의 고등학생들은 여전히 우리 역사의 희망이고 자산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는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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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3년 10월 14일 신당역의 기적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은 있다. 힘겹거나 슬플 때 문득 눈을 감으면 홀연히 되살아나 어깨를 두드리고, 모니터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 놨다가 들춰 보며 혼자 웃다가 울다가 하며 지친 일상을 잊을 수 있는 기억, 아무리 부대끼고 속시끄러워도 그곳 생각에 이르면 그냥 키득거려지고 다물린 입이 벌어지는 그런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재생산해 주는 지점들은 우리 뇌리 속에 도로변 ‘쉬어가는 곳’처럼 남아 있다. 2003년 10월 14일은 참으로 팍팍하고 겁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누가 휘두른 묻지 마 칼날에 목이 베일지 모르고 혹시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내 머리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늘까지도 살펴야 하는 한국 사람 모두에게 살가운 추억이 만들어진 날이다.
그 추억은 지하철 역 안에서 일어났다. 네이버 블로거 jitow님의 사진과 기록을 통해 그날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밤 10시 20분 경이었다. 하루의 일과로 지친 사람들, 2차쯤을 거쳐 술냄새 풀풀 풍기는 취객과 여전히 참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학생들이 뒤섞인 인파가 지하철 2호선 객차를 메우고 있었다. 신당역에 들어선 열차가 급작스레 급정거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정차였다. 이유인즉슨 한 남자가 선로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관사가 뛰어내려 상황을 살폈다. 남자는 천만다행히 열차에 치어 죽지는 않았지만 열차와 선로의 좁은 사이에 꼼짝도 못한 채 끼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은 갑자기 벌어진 참상 앞에서 놀랐다. 여자들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핸드폰으로 119를 부르는 이도 여러 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불행한 일을 당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내심 어떻게 되는지 보자 하는 호기심으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떠나지 않는 열차에 퍼져 앉아 언젠가 가겠지 잠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119를 부르기는 했지만 선로에 끼인 채 열차에 압박당하고 있는 피해자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한 사람이 외쳤다. “밀어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수레 앞에 선 사마귀처럼 두 팔을 들어올리고는 전동차에 달라붙었다. 순간 그 주위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리라. 저 사람 뭐냐?는 의아함부터 지금 전동차를 사람이 밀어서 움직이겠다고? 하는 실소, 그렇게라도 해 볼까? 홀로 용쓰는 아저씨의 어깨를 응시하던 안타까운 시선, 그냥 119가 올 때까지 가만 계쇼 하는 신중한 눈길까지 범벅이 된 잠깐의 침묵이었으리라.
그때 몇몇 사람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가만. 몇 명만 더 달라붙으면 이 칸은 어떻게 흔들어서 그 틈을 타서 깔린 아저씨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동네 헬스클럽 강사 아저씨는 문득 자신의 근육을 실룩거렸고 술 취한 대학생 몇 명은 눈빛으로 야 야 붙어! 를 교환했을 것이다. 몇 명이 더 전동차에 달라붙었다. 그러려면 무게를 줄여야 했겠지. 누군가 목청 큰 아저씨가 차 안에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거기 다 내려요. 사람이 죽어간단 말이오. 아 빨리 안 내리고 뭘해?”
사람들은 부리나케 내렸고 플랫폼은 신당역이 목적지가 아닌 사람들로 갑자기 붐볐다. “한 번 밀어 봅시다. 다 내렸으니까.” 일단 몇 명이 달라붙자 긴가민가 하던 사람들도 손을 보탰고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용을 쓰게 됐다.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안에 다 내리게 해!” “다 나와요!” 이럴 때 나는 듯이 움직이는 사람들 반드시 있다. 등화관제 때 집집마다 불 끄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은 온 칸으로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내리세요. 열차를 가볍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깔렸어요. 어르신 어서 나오세요. 학생 뭐해 빨리 튀어나와.” 몰려나온 사람들이 플렛폼에 섰을 때는 이미 꽤 많은 이들이 될 것 같지 않은 일에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또 부르짖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밀어요!”
깡마른 아가씨가 낑낑대며 전동차 밀기에 가담했을 때, 멀거니 쳐다보던 장정들이 불에 덴 듯 달
산하의 오역
1859년 10월 16일 문제적 인물 존 브라운
80년대 대학가 술자리에서 깔깔대며 부른 노래가 있다. “관악산에 자리잡은 서울대학은 총장이 어용이라 교수도 어용.”....으로 시작하는 노래. 연세대는 ‘제비’였고 고려대는 ‘술꾼’이었고 공부 열심히 하는 서강대는 ‘고삐리’ 데모할 때 과격하기로 유명했던 성균관대는 ‘깡패’ 등등으로 그 특질들을 끼워 맞춘 노래였고 자기 학교를 부를 때는 언제나 ‘투사’라든가 멋있는 말을 넣어 부른 뒤 “영광 영광 XX대학 영원히 빛나리” 하는 후렴으로 맺곤 했다.
이 노래의 원곡은 매우 전투적인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지만 원래 19세기 미국에서 의용 소방대의 노래로 만들어졌고 이후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군가로 고창되기도 했던 노래다. 그런데 군가로 불리울 때 이 노래의 제목은 좀 특이했다. ‘존 브라운의 시신’이었으니까. 이 노래 가사는 군가답게 단순하다. “존 브라운의 시신은 무덤에 잠들고 (세 번 반복) 후렴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후 “His soul is marching on." (그의 영혼은 전진하고 있으리라) 그 뒤 가사도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자. 북군 병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남군과 싸웠고 승리한 뒤에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럼 이 흔하디 흔한 이름 존 브라운은 누구인가. 왜 그는 북군의 우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는 피혁공장에서 일했다. 돈벌이에는 별로 소질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독실한 청교도이자 열렬한 노예 해방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공장은 곧잘 흑인들을 도와 탈출시키는 비밀 조직의 아지트로 즐겨 쓰였고 존 브라운 자신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의 어느 날 김승같은 학대를 받는 흑인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럴 수는 없다! 그날의 기억은 존 브라운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노예 문제로 미국은 거의 정신적인 분단 상태에 있었다. 노예 옹호론자들과 노예 폐지론자들은 새로운 주가 연방에 가입할 때마다 그 주를 노예 허용 주로 가입을 허락할지 노예폐지 주로 등록할지를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유명한 건 역시 ‘피의 캔사스’ 라 불리우는 유혈 사태일 것이다.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는 캔사스 주를 놓고 노예 옹호자들과 반대자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 대치에 들어간다. 양측은 모두 대량의 이주민들을 투입하여 캔사스 주를 장악하려 들었고 그 와중에 치른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양쪽 모두 경건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노아의 자손 중 노아의 알몸을 본 아들들은 영원히 그러하지 않은 아들을 섬기게 되리라 하셨다.”는 설교에 열광했고 또 한쪽은 “비기독교적인 노예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총과 성경”이라는 말에 아멘을 부르짖었다. 양쪽의 충돌은 당연히 캔사스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일단의 노예 제도 지지자들이 1856년 5월 로렌스 시를 습격하여 자유주 지지자들을 살해한다. 이는 그때껏 잠자고 있던 한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행동이었다. 노예 지지자들의 행동에 분노하여 떨쳐 나선 이 가운데 존 브라운이 있었던 것이다. 존 브라운은 그의 네 아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을 모아 노예 지지자들을 습격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을 토막내 죽인다. 그것도 그들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사지를 잘라 죽인 것이다. 광기에 가까운 눈빛을 가졌다는 것이 존 브라운을 만나본 이들의 평이긴 했지만 그의 행동은 노예 지지론자에게는 거의 악마와도 같은 반열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미국 역사에서는 포타와토미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이후 "피의 캔사스“는 더욱 피비린내를 풍기며 사람들의 목숨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존 브라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는 남부의 심장부 버지니아의 산악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그곳을 탈주노예들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꿈을 꾼다.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위해 자신의 아들들과 ,지지자들, 일단의 헤방 노예를 그러모아 연방군 무기고를 습격
1921년 10월 21일 청산리의 기관총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와중에 유라시아 대륙을 극에서 극으로 누비고 다녔고 ‘끈 떨어진 갓’의 신세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랫 동안 싸우면서 의연하게 혈로를 뚫어 끝내 성공적인 장정을 마친 군대가 있다. 이름하여 ‘체코 군단’. 그들은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하에서 징집되었다가 탈주하거나 그전에 망명했던 체코인들로 이뤄진 부대였다. 이들은 동부전선에서 자신들의 압제자와 한패였던 독일군에 맞서 싸웠는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 정부가 독일과 강화를 맺으면서 그 처지가 오묘해진다.
연합군측은 이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구 러시아 제국군의 일원이었던 이 이방인들을 붉은 정부는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거니와 러시아의 서부 국경지대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기에 체코 군단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를 타고 귀환하는, 실로 엽기적인 경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열차에 올라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이들은 많은 무용담을 세운다. 적군(赤軍)이 섣불리 체코 군단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그들은 간단하게 적군을 무찌르고 한 도시 일대를 점거하기도 했고 러시아 백군(白軍)을 도와 싸우기도 했던 그들의 열차에서는 신문이 발행됐고 우체국이 운용되었으며, 탈취한 금괴들까지 잔뜩 실려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고 협상 끝에 안전한 귀국을 허락받는다. 그들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대한 독립군 북로군정서 조직원들이었다.
"이제 당신들이 필요한 건 무기가 아니라 돈이지 않겠소? 충분치는 않지만 이것들을 받고 당신들의 무기를 건네 주시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
북로군정서가 건넨 것은 만주 지역 도처에서 살아가던 한국인들이 피같은 돈을 모아 만든 군자금이었다. 그리고 금비녀니 금반지니 비단보자기니 하는 잡동사니 패물들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체코군들은 이 변변찮지만 절절한 재물과 무기를 바꾸기로 한다. "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들이 화승총과 죽창으로 개틀링 기관총으로 맞서다가 몰살당한 이래 한국의 무장 세력이 일본에 대등한 무기로 맞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1,200정의 소총과 80만발의 탄약, 박격포 2문과 기관총 6정 등의 무기가 북로군정서 대원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1921년 10월 21일 시작된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의 연합 부대는 같은 피압박 민족의 군대로부터 건네받은 총알을 모처럼 시원스럽게 퍼부어 댔다. "총구는 조국의 눈이다. 총알은 조국의 선물이다. " 김좌진의 포효는 차라리 절규였다.
며칠 동안이나 계속된 전투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싸운 독립군들을 위해 인근 한국인들은 주먹밥에 소금을 쳐서 포탄을 무릅쓰고 독립군들에게 져 날랐고 독립군들은 밥 한 입에 총 한 방씩을 쏘며 싸움을 멈추지 못했다. 마침내 어랑촌이라는 곳에서 마지막 혈전이 펼쳐진다. 어랑촌이란 지명은 함경북도 경성의 어랑사라는 곳에서 살던 한국인들이 마을을 개척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일본군이나 독립군이나 외나무다리였다. 지형은 독립군들이 유리했지만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맹렬하게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던 기관총 하나가 갑자기 침묵한다. 기관총 사수가 총에 맞은 것이다. 여인네들의 금비녀와 아이들 돌반지와 바꿨던 단 6정의 기관총 중의 하나. 나이조차 정확리 기록되지 않은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이 달려들었다. 그는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묶어 버린다.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고 총에 맞더라도 죽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각오.
산하의 띄엄띄엄 오역
0000년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밤에
항상 년도를 붙이는데 오늘은 파격적으로 붙이지 않는다. 아니 붙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밤. 가수 이용이 가장 바쁜 날이다. 미파솔 미도 시도 라시솔..... 사람의 심장을 솔솔 감아드는 멜로디의 전주와 더불어 이용 특유의 절절한 목소리로 웅숭깊게 시작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의 이 노래를 40대 이상이라면 오늘 한 번쯤 흥얼거려 봤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가수 이용을 지척에서 봤었다. 동네 아저씨들끼리 한 잔 하는 김에 새로이 개장한 7080 까페에 가게 됐는데 아 글쎄 그날의 초대 손님이 이용이었던 것이다.
그도 많이 늙어 있었다. 음색도 꽤 갈라지고 탁해졌지만 관록이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잊혀진 계절”을 부를 때 나는 자연스럽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쥐어짜듯이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를 부르짖을 때 레코드방 스피커 앞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그 막대한 고음에 꽥꽥거리면서 따라 부르던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봤던 건 박정희 대통령이 총 맞고 전두환이 들어선 후였다.
빈약한 정통성을 지닌 정권은 대개 색다르고 거창한 이벤트를 기획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서 자신의 구린 데를 감추고자 하기 마련이다. 5공화국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3허'라고 하여 실세 중의 실세라고 불리우는 세 명의 허씨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허문도는 자신들이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강제로 닫게 했던 민영방송사 TBC가 만들었던 한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는다. TBC는 제 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연 바 있었는데, 허문도는 이 소박한 규모의 프로그램을 엄청나게 뻥튀기하고 제 5공화국 헌법에 새로이 삽입된 '민족 문화 창달' 조항에 부응하는 어마어마한 관제 축제로 만든다. 이것이 그 이름도 고풍스런 '국풍 81'이었다.
하늘을 나는 로케트도 떨어뜨리는 세도가의 기획이었다. 자그마치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하는 가운데 "'새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의 힘이다"라는 가슴 벅찬 슬로건을 내건 국풍 81은 1981년 5월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198개 대학의 수천 명의 학생들과 그만큼의 일반인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벌이는 온갖 민속놀이와 흐드러진 술판으로 온 여의도가 흥청거렸고 정권은 통행금지를 일시 해제하는 파격까지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정작 허문도로서는 아쉬운 것이 있었다, '민족 문화 창달'의 취지에 걸맞는 대학생 탈춤반들의 참여가 전무했던 것이다. 섭외는 물론 해 보았지만 정권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는 국풍 81에 참여하겠다는 탈춤반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허문도는 졸업생이나 군대에 있던 사람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대 탈춤반'을 급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국풍 81에서 민족 문화 창달을 위한 차전놀이나 풍물이나 고싸움 등등보다 월등 인기를 누린 것은 역시 대학생들의 가요제였다. 여기서 서울예전에 다니던 이용은 <바람이려오>라는 곡으로 누가 봐도 압도적인 가창력을 선보인다. 누구나 대상은 이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대상은 서울대 그룹사운드에게로 돌아갔다. 정권의 실세께서 기획하신 행사 수상자의 '네임밸류' 도 고려해야 하는 정치적 이유로, 이용이 타야 할 상이 엉뚱한 곳으로 갔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하지만 개운찮은 1등을 한 서울대팀은 잠깐 사이에 사라졌지만 이용은 곧 조용필의 도전에 아성하는 가수로 우뚝 서게 된다. 그 기폭제이자 대표작이 <잊혀진 계절>이었다.
원래 이 노래는 이용이 아니라 조영남을 겨냥해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가사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9월의 마지막 밤을....’이었다고 하는데 어쩌다보니 이용이 부르게 됐고 발표 시기가 늦춰지는 바람에 10월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곡도 곡이지만 사실 이 노래는 가사에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자 앞에서는 돌이 되어 버리는 성향을 지닌 수많은 남자들이 공감할 사연이 얽혀 있기도 하다. 작사가 박건호는 정수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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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1.1 창경원의 탄생
사극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아 그 장면! 하고 아는 체 할만한 장면 두 개를 얘기해 보자. 하나는 복위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었다가 발각된 장희빈의 표독한 표정, 그리고 아바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뒤주를 두들기다가 죽어가는 사도세자. 이 두 장면에는 곧통점이 있다. 그 일들이 벌어진 무대가 창경궁이라는 것이다. 원래 태종을 모시려고 세종이 지은 수강궁이었다가 성종 때 창경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던 궁궐. 다시 짓긴 했지만 위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만큼 터가 센 탓인지 몇 번의 화마를 겪으면서 구한말에 이른다. 그리고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은 또 다른 기구한 변신에 직면하게 된다.
1909년 11월 1일 잘 차린 모닝코트에 모자까지 멋지게 쓴 땅딸막한 청년이 창경궁 앞에 나타난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하나도 없어 뵈는 그 청년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었다. 그는 그의 궁궐 중 하나였던 창경원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이고 그 개장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에게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니 궁전의 조영과 동식물원을 신설하시오."라고 권했던 외국인은 유감스럽게도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바로 6일 전 하얼삔에서 그 일본 노인은 한국 청년의 총에 사살당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창경궁의 동식물원 건립 공사는 190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창경궁 명정전과 남북 행랑 및 주요 전각을 박물관으로 하고 남쪽의 보루각(報漏閣) 일대에 동물원을, 북쪽 춘당대(春塘臺)에는 식물원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공사가 날로 거세지면서 창경궁 안이 말도 아니게 훼손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대한매일신보는 '동물원을 수축할 차로 동궐(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는 전각을 몰수히 허는데 그 중에 천여 년 된 옛 전각도 또한 훼절한다더라' (1908.3.6)고 안타까와했다. 하지만 공사는 완공되었고 호랑이와 곰, 토끼 제주 말 등이 어울린 최초의 '동물원'이 탄생했다. 이날 이후 창경궁은 대중에게 개방되는데 순종 황제는 지엄한 궁궐에 웬 상것들이냐고 펄쩍 뛰는 사람들에게 "군주는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달래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군주 자신이 즐거워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건 구중궁궐에서 나들이 장소로 둔갑한 창경원에 출입이 제한된 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술 취한 사람 , 의복이 남루한 사람' 그리고 또 하나 더 있는 기준은 좀 애매하다. '미친 사람'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곳에 길을 내 버리고 창경궁의 전각들을 무시로 헐어버린 일제가 '창경원'의 뜰에 들여놓은 것은 수천 그루의 벚나무였다. 서울에서 자란 이들 대부분은 "창경원 벚꽃 놀이"를 희미하게 기억하거니와 창경원이 상춘의 벚꽃놀이터가 된 것은 1924년부터였다. 참 속없는 조선 백성들은 그 벚꽃 놀이 아래서 봄을 즐기고 놀았다. 그로부터 60년 동안. 순종 황제가 살아 생전 목요일은 창경원이 문을 닫았다. 순종이 창경원을 산책하는 날이었고 그 기분을 맞춰 주겠다는 배려(?)였다. 과연 순종은 어제 신민들이 떼거리로 들어와 벚꽃 놀이를 질탕하게 즐겼던 그 길에서 무슨 느낌이었을까? 망국의 군주로서의 미안함? 철없는 백성들에 대한 진노?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숨 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던 콩가루 집안에 자신의 어머니가 제 지척에서 살해되고 담요에 돌돌 말려 화장되는 동안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던 순종. 그가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선물이 창경원이었다. (물론 일본의 강요도 있었지만)
창경원 벚꽃놀이가 한창일 무렵, 1926년 순종은 죽는다.그의 유조 중 일부라는 내용을 옮겨본다.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일본을 가리킴)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한 것" "이라고 그는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통함은 이미 창경원 벚꽃놀이에 묻혀 있었다. 동물원의 가장 큰 비극은 전쟁 때 찾아왔다. 피난을 가야 했던 관계자들에게 정부는 창경원 동물 모두를 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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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3일 국장의 날
197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국장일이었다. 일주일 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적인 장례일이었고 이날 초중고 전 학교는 휴교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눈으로 그날을 돌이켜 본다.
국장이 있기 전날 담임 선생님은 또 한 번 우리의 다리를 아프게 했었다. 종례 때 반장이 일어서 차려 경례 한 후 보통은 짤막하게 얘기하고 앉히는게 상례였는데 그날도 장장 수십 분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던 것이다. “내일은 국장일이다. 느그 집안에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우예 되겠노. 밥이 넘어가겠나. 책이 눈에 들어오겠나. 똑같아. 내일은 나라의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느그도 학교 안나오는 기다. 공부가 눈에 안들어와서. 선생인 나도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재구성한 멘트는 이렇지만 당시의 선생님 멘트와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싸 어쨌든 학교에 안나오다니 이게 웬 떡이냐. 몇 놈들이 참 철도 없이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와 내일 학교 안 나온다 환호하다가 바로 옆반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때 십년 굶은 호랑이 멧돼지 본 기세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 선생님에게 그 몇 놈의 아이들은 눈동자가 돌아가도록 얻어터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동네 유치원 원장님께 심부름을 갔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 사무를 보고 있던 원장 선생님이 TV를 켜고 계시지 않길래 나는 입바른 소리 잘하는 어린이로서 설레발을 떨었다. “샘예. 국장 보셔야지예. 대통령 장례 아닙니꺼.” 그러면서 역시 호들갑을 계속하면서 티븨를 켰다. 또깍. 흑백 TV에 실황 중계가 비쳐졌다. 광화문 네거리에 긴 아치로 된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장 휘장도 보였다. 그때 나이 쉰 줄의 원장 선생님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일은 참 많이 했지 저 사람이.” “나라의 아버님”이 가신 마당이었기에 나는 의아해서 유치원 원장 샘을 바라 보았다. “저 어르신”도 아니고 “저 분”도 아니고 “저 사람”이라니. 그런데 그 다음 튀어나온 말을 나는 지금도 그 특유의 경상도 억양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소새끼같이. 소새끼같이 열심히 했지.”
서울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 그 뉘앙스가 애매할 수 있으나 경상도 사람이 저 말을 감정을 담아서 하면 그 뜻은 확연하고 명료하다. 그때 원장 선생님은 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안좋다는 것은 확실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원장 선생님의 방점은 확연히 열심히 했지가 아니라 소새끼에 찍혀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급반전되어 있었다. 직장 나가신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티븨 앞에 못 박혀 계셨다. 그때 모니터에 비친 이는 바로 이번 대통령 후보로 나서신, 어려서는 어머니를 닮았나 했더니 나이 들어갈수록 부전녀전인 듯 보이는 바로 그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얼마 전 “불쌍하지 않냐. 일찍 조실부모하고.....”라고 하면서 박근혜 후보 동정론을 펴는 누군가에게 “니 부모는 지금 살아 계시지 않으니 너도 불쌍하구나.” 라고 반문하실 정도로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당시 바로 티븨 앞에서 그 말을 하셨다. “불쌍해서 어떡하나.”
그 후로 펼쳐진 풍경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면 안다. 영구차는 투명했고 그 안에 태극기 덮인 관이 있었고 육사 생도들이 그 관을 호위하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각을 지어 걸어갔다, 모르긴 해도 아마 다음날 육사 생도들 무릎 아작났을 것이다. 연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그리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부모가 잃은 듯이 울었다. 어떤 할머니는 엎드려서 울었고 우리 동네 곳곳에서도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나는 알았다 울음은 전염되는 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울음은 전파되었으며 나중에는 소새끼 운운했던 원장 선생님까지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열흘
좀 뒤늦은 산하의 오역
1987년 10월 25일 응답하라 1987
<응답하라 1997> 이라는 드라마가 대인기를 구가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97년에 관한한 아련한 추억 따위는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다르냐 싶은 심경인데 또 드라마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하 저때는 그랬지 싶은 소품과 풍경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먹고 살기 바쁜 때였으니 그것들을 무심히 지나쳤을 뿐, 그 즈음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웠던 이들에게는 1997년이란 가늘게 눈을 뜨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15도 위로 향한 채 그때는 그랬지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시기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자꾸 1997보다는 숫자가 열 앞서는 1987이라는 숫자가 아른거린다. 기분 나빠지는 건 <응답하라 1997>과는 달리 돌아보기조차 암담한 기억이 그 숫자에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억을 응축시켜 보여주는 사진이 아래의 사진이다. 한때 민주화 동지로서 어깨 걸고 군부독재에 맞섰고 결국은 차후 대한민국 대통령을 차례로 지냈던 두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있나를 절묘하게 보여 준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찍혔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고바우 4컷 만화 중 하나는 이랬다. 온 동네 집마다 “죽 쒀서 개 줄라” 소리가 요란하다. 동네 개 두 마리가 만나서 너 죽 먹었냐? 아니 하는 문답을 교환하고는 골똘히 생각한다. “대체 누굴 줬다는 소릴까.” 불에 손 데고 허벅지 데어 가며 진땀 흘리며 마련한 죽을 웬 똥개가 포식하는 상황이라면 죽 쑨 사람들 가슴에는 바주카포 포탄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것도 원래는 죽을 쑤려는 게 아니라 개 한 마리를 때려잡은 뒤 푹 삶아 된장을 발라버릴 심산이었는데, 그 문제의 개가 삶아지기는 커녕 펄펄 살아서 남이 애써 끓인 죽을 가로채 그릇 바닥이 뚫어질세라 박박 긁어 먹었다면 이 얼마나 시일야방성대곡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 사진은 그 사실을 축약한다.
저 두 사람은 누차에 걸쳐 단결과 승리를 약속했다. 반드시 단일화하겠다고 몇 번씩이나 공언했고 그러지 못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언명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명확한 단일화의 원칙이 있었다. “나로 단일화돼야 단일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총재님이 단일화 후보로 나가는 것이 역사의 순리요 상식이라고 주장했고 그를 통해 별별 논리들이 동원됐지만 결국은 위의 “내가 돼야 단일화”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단일화 압박은 지금의 상상 이상으로 거셌다. 단일화 ‘시한’까지 정해 놓고 둘에 대한 압박이 전개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회고에 따르면 동아일보 사장까지도 담판장의 중재자로 나설 정도였다. 불안했지만 믿음은 확고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단일화할 거야. 똑똑한 사람들인데.”
그 시한은 9월 29일이었다. 하지만 죽 끓는 시끄러움 속에서 둘은 이렇게 발표한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은 2시간 가까이 회동했으나 합의된 사상은 솔직히 없다. 두 사람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과 당원들에게 죄송하다. 그러나 각기 오늘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더 숙고하고 측근과 깊이 있는 검토와 상의를 해서 필요하다면 다시 만나 논의하기로 했다.” 사실상의 단일화 결렬 선언이었다. 일단 내 갈길 가는 가운데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 네가 두 손 들고 들어온다면 (깊이 있는 검토와 상의) 다시 만나 논의하겠다는 것이 결국 둘의 얘기였다.
둘 중 누가 되든 단일화만 될 것 아니냐는 사람들보다는 둘 중 내가 지지하는 쪽이 후보가 돼야 한다는 이들이 월등히 많았던만큼 사활을 건 편 가르기가 시작됐다. 그러는 사이 지지와 충성은 혐오와 적대감으로 전화되는 수가 많았고 장담컨대 정권은 그 틈을 파고들어 양쪽 모두의 등을 떠밀었다. 지지가 바위처럼 굳을수록 그 바위는 단일화의 숨통을 틀어막았고 서로의 약점을 들추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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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7일 나의 빠삐용, 스티브 매퀸 가다
술자리가 있었는데 문득 그런 질문이 나왔다. “네 인생의 영화를 딱 하나 고르라면 뭐겠냐?” 급작스런 질문에 한참 더듬거리다가 끄집어낸 이름이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초반은 좀 지루해 보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의 시선과 감정의 끈을 놓아주지 않았던 명화였음은 분명하지만 어제의 대답은 분명한 내 건망증의 소산이었다. 내 어찌 <빠삐용>을 잊었단 말이냐.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본 이래 수 차례 TV에서 틀어줄 때마다 본방을 사수하며 그 감흥을 기억했던 영화, 두고두고 인상깊은 영화란에는 거의 어김없이 적어 넣었던 영화 <빠삐용>을 잊어버리다니. 하필이면 그날은 11월 7일 스티브 매퀸이 떠난 바로 그 날이었는데.
나는 빠삐용을 두 사람의 비디오와 오디오로 기억한다. 비디오는 당연히 주름살 많고 고양이처럼 파란 눈을 가진 스티브 매퀸이지만 그 목소리는 ‘형사 콜롬보’의 성우였던 故 최응찬씨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후일 DVD로 영화를 다시 감상했을 때 그 감흥이 확 떨어질만큼 최응찬의 목소리와 스티브 매퀸의 외모는 신묘하게 맞아떨어졌었다. 그 유명한 꿈 속 재판 장면에서 “네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심판자들의 평결에 “나는 유죄야.”라고 중얼거리던 순간, 그 목소리와 비디오의 조합은 최고조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스티브 매퀸은 많은 명장면을 보여 줬다. 그 영화 속에서 스티브 매퀸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연기들에는 그의 인생의 단면 단면이 녹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형지로부터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비오는 날 호수에 몸을 던지는 빠삐용의 모습은 어린 시절 곡마단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사고나 치고 돌아다니다가 문제아 수용시설에 수용되었던 시절, 툭하면 탈출을 시도했던 요주의 청소년이었던 스티브 매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는 감옥에서 벌레를 잡아 씹어먹어서라도 살려고 노력하던 그 표정은 유조선 선원부터 타일공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먹고 살아야’ 했던 즈음에 지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리가 부러진 친구 드가 (더스틴 호프만)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같이 도망가려고 애쓰던 빠삐용의 모습은 해병대 근무 시절 북극해에서 배가 좌초하면서 그 차가운 바닷물에 동료들이 빠지자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혼자서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해 대통령 표창을 받고 대통령 경호 함대원으로도 근무했던 그의 이력을 비추어 보게 만든다.
그가 무명 여배우와 데이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배우 스티브 매퀸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강권으로 응했던 오디션에서 그는 엄청난 경쟁력을 뚫고 합격했고 그의 초반 단역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기 절정의 스타 폴 뉴먼이 주연한 <상처 뿐인 영광>의 단역이었다. 후일에는 70년대 헐리우드를 양분하는 대형 배우로 경쟁하게 되지만 스티브는 <상처 뿐인 영광>에서 폴 뉴먼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 찌질한 깡패로 스크린을 장식한다. 그래서일까 스티브 매퀸은 폴 뉴먼에게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드러냈고 폴 뉴먼 역시 내색을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스티브 매퀸을 이기고자 무진 노력했다고 한다. 폴 뉴먼이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함께 출연하고자 했던 것은 스티브 매퀸이었지만 맥주까지 사들고 설득하러 간 폴 뉴먼의 청을 끝내 거절했고 그 대타를 차지한 것이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하지만 이 두 스타는 <타워링>에서 기어코 그 멋진 호흡을 맞춰 보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건축가 폴 뉴먼. 옥상의 물탱크를 터뜨려 불을 끌 수 밖에 없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나오죠?”라고 묻다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 열정적인 남자 폴과 쿨한 남자 스티브는 그렇게 엇갈렸다.
<러브스토리>의 생머리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를 홀릴 만큼 매력이 풍부했고 영화 <블리트>에서는 전설적인 자동차 추격신을 스턴트맨없이 본인이 직접 찍었던 터프가이. 그래도 나에게 스티브 매퀸은 역시 <빠삐용>으로 남는다. 비록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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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9일 전국 노래 자랑 시작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라면 단연 <전국 노래 자랑>입니다. 1980년 11월 9일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서른 두 돌을 맞네요. '딩동댕동'과 '땡~~'을 합격과 불합격을 가리키는 일종의 국민적 의성어로 만들다시피 한 이 프로그램은 그 동안 전국을 몇 바퀴 돈 것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도 열렸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그 이름을 뽐냈던 일종의 국민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원조 국민 MC 송해 선생님과 함께죠. 그런데 하나 착각하지 마실 것은 송해 선생님이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맡으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가수 이한필이 오랫 동안 진행했고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도 잠깐 마이크를 잡았고 MC 최선규씨도 전국 노래 자랑의 무대에 선 일이 있습니다. 송해 선생님이 전국 노래 자랑의 부동의 MC로 등극하신 것은 1988년의 일입니다.
빰빠빠 빰빠 빠아아암 빠 ~~~ 경쾌한 시그널 뮤직은 일요일 낮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애초 송 선생님은 이 프로그램이 "몇 십회 나가다 보면 끝날 것"으로 여겼답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시와 군 행정구역 전부를 따져 봐야 몇 개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고 대도시의 경우 구별로 나눠서 열리기도 하고 간 곳 또 가고 하다 보니 그 세월이 30년을 넘기게 됐지요. 이쯤 되면 이건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전국 노래 자랑> 연출팀은 일종의 유랑극단 같았다고 해요. 담당 PD는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갔고 그 휘하에 카메라 조명 세트 스탭에다가 경음악 반주반과 국악 반주반까지 휘몰고 다녔으니 유랑극단이 따로 없었겠지요. 80년대만 해도 할아버지들이 갓 쓰고 나오셔서 그 쉰 목소리로 "장산곶 마루에~~~~"나 "한오백년"을 부르셔서 국악 반주로 흥을 맞춰 드렸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지요. 민요 들으며 자란 세대는 가시고 '목포의 눈물' 정도 들으며 자란 세대가 백발이 성성해진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이 프로그램 PD가 쓴 글을 읽는데 그는 가장 인상 깊게 촬영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완도를 들고 있더군요. 전남의 몇몇 군이 그렇지만 완도군 역시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군이죠. 완도에서 <전국 노래 자랑>을 하는데 좀 걱정이 앞서더랍니다. 완도군민 수도 얼마 안되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녹화 당일 담당 PD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완도항이 완도군 관할의 각 섬들에서 섬 주민들을 싣고 온 통통배와 어선들로 미어터졌던 겁니다. 그 PD는 '완도상륙작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더군요. 상상해 보세요. 완도항이 미어터지는 가운데 간만에 나들이옷 차려 입고 "아따 이거 볼라고 포도시 포도시 왔네." 서로 인사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이닥치는 관중들의 정경을. 담당 PD는 어깨가 으쓱한 정도가 아니라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했을 겁니다.
30년 역사에 그런 일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여든 다섯 딸이 백 세 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미 가물가물하신 어머니가 가사를 까먹자 여든 다섯 딸이 꼬박꼬박 가사를 불러 드리며 노래를 맺었다는데 생각하면 참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경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도 최고령 출연자의 영예를 차지하기엔 너무 젊으셨습니다. 118세 된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신 적도 있으니까요. "너무나도 행복하다."고무대 출연 소감을 밝히신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3일 뒤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아마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제 세상에 무슨 여한이 있겠나 텔레비에도 나와봤는데 하며 저승사자를 재촉하며 가셨을 겁니다. 그런 사연도 있었다더군요. 한 번은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난 형제들이 무대에 올라왔길래 하도 귀엽기도 하고 장난도 칠 겸 악단장에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아가라고 했는데 마침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악단장 겸연쩍어하며 세뱃돈 만 원 씩을 쥐어 줬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 뒤 같은 지역을 찾았던 <전국 노래 자랑> 무대에 이제는 열 일곱, 열 아홉, 스물 한 살이 된 형제가 또 무대에 올랐답니다. 그들은 그때 받
산하의 오역
2005년 11월 11일 어느 소년의 죽음
"영인아. 영인아." 2005년 11월 11일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비닐하우스촌 어귀에서 나이 쉰 넷의 교사가 안타까운 어조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담임의 출산휴가로 임시로 두 달 전부터 맡게 된 반에서 영인이는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띄어쓰기는 전혀 배우고 익히지 못한 아이의 글을 보면 기가 턱 막혀 온 터에 다른 아이들 말에 따르면 엄마 아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혼자서 비닐하우스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했으니 교사 이전에 아이 기르는 부모로서 마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옷은 아이를 돌보는 손길이 전혀 없음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40분 걸리는 학교를 꼬박꼬박 나오던 아이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결석했기에 아이의 집을 찾은 것이다.
10월 11일 교사는 아이를 불러 면담을 했다. 면담 결과 교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이의 공식적인 보호자는 외조부와 외조모인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살던 이모가 결혼을 해서 서울로 떠났고 아이의 외조부 외조모는 충남 당진으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는 것이다. 즉 9월 중순 이후 아이는 비닐하우스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정말 너 혼자 산다는 거니?" 아홉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알게 된 학교는 의왕시에 사실을 전달하고 대책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반문은 "그 아이 수급자입니까?"였다. 절차와 조치를 기다리면서 교사는 일단 아이의 통학부터 챙기기로 했다. 출근할 때 마을 어귀에서 아이를 만났고 퇴근할 때는 아이를 태워 주었다. 아이도 선생님을 따랐다. 1시면 끝나는 수업 뒤 아이는 다른 데 가서 놀 생각도 않고 선생님 옆에서 놀면서 선생님의 퇴근을 기다렸다. 허기야 집에 가봐야 친구들은 다 학원에 갔을 것이고, 게임기 하나 집에는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교사의 아내는 갑자기 차에 실리기 시작하는 라면 박스와 빵에 놀랐다. 아니 이걸 어디에 쓰는 거예요. 아 우리 반 애 줄 거요. 당장 어디로 옮기고 싶은데 맘대로 안되네.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렇게 챙기던 아이였는데 어느날 아침 클랙슨을 울리면 밝게 웃으며 선생님 차로 뛰어오던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가 볼까 했지만 친구 집에 가서 잤나 싶기도 해서 학교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교사는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사정을 보고한 후 아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영인아 영인아."
막 집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교사는 혼비백산한다. 몸길이 130센티미터가 넘는 곰같은 개가 거칠게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엄두가 안난 교사는 경찰을 불렀지만 경찰도 개를 잡을 방법은 없어서 일행은 뒷문으로 비닐하우스 영인이 집으로 들어갔다. 전기밥솥의 밥은 새까맣게 썩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는 집에 없었다. 교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구나. 하지만 여전히 사납게 짖어대고 있는 개의 울음은 뭔가 불길하고 흉폭했다. 교사는 수업 후 다시 영인이의 집을 찾는다.
그때 교사는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접한다. 영인이는 양말만 신은 알몸으로 개에게 물어뜯겨 죽어 있었다. 옷들은 개가 찢어발긴 것 같았고, 이빨 자국은 수십 군데였다. 아이를 물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듯 긁힌 상처도 깊게 나 있었다. 아이는 그 끔찍한 순간을 죽어서도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영인이를 물어죽인 개는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앞에서도 무섭게 저항하다가 경찰관의 권총 세 발을 맞고서야 고개를 떨궜다. "개밥을 주는 게 재미있다."고 일기에 썼던 아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밤과 낮을 맞던 아이는 전기밥솥의 밥 썩는 냄새 진동하는 집에서 선생님이 준 라면을 유품으로 남기고 개에게 물어뜯겨 죽음을 맞았다.
"시장에 가서 할머니가 책가방을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라고 또박또박 일기에 쓰던 할머니는 먼곳에 있었고 개가한 어머니는 죽은 뒤에도 며칠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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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12일 도끼살인자 고재봉 검거
1963년 11월 12일 청계천 5가에서 장사하던 한 땅콩 장수는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표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그가 의심을 두고 수상하게 본 것은 간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첩을 방불케하는 현상금이 붙은 사람이었다. 바로 대략 20여일 전 강원도 인제에서 육군 중령 일가족과 가정부 총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여 버렸던 살인마 고재봉이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후일 연쇄살인사건이나 여러 명이 희생된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원조격으로 들먹여진다.
21세기 세계 14대 경제 대국이 어쩌고 하는 나라의 군대에서도 사병들 군화가 없니 어쩌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는 판이니 60년대의 군대가 어땠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요즘 북한 인민군들이 즐겨 한다는 농담처럼 사단에서는 사정없이 떼먹고 연대에서는 연달아 해 먹고 대대에서는 대대적으로 떼먹고 중대에서는 중간 중간에 해먹는 것이 당시 한국군의 현실이었고 사병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고재봉도 그 중의 하나였다. 3군단 예하 1109 야공단 소속이었던 그는 대대장의 당번병 격으로 뽑혀 사택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던 그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가 가정부에게 걸린다. 그게 누룽지였다는 말도 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는 말도 있고 애인 만나는데 군화가 낡아 대대장의 군화를 대신 신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뭔가를 들고 나오다가 걸린 고재봉은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가정부에게 도끼를 들고 협박했다가 영창으로 간다.
그때껏 발생한 도난 사건의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쓴 그는 7개월 영창 살이를 하는데 그 철창 안에서 그는 이를 악문 악마가 된다. 출감하면 자신에게 이런 대접을 한 대대장 가족을 다 몰살시키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출감한 뒤 대대장 집 근처 짚단 속에서 이틀을 새우는 독기를 발휘하며 살인을 준비한다. 그리고 깊은 밤 대대장 관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대대장과 그 아내, 아이들과 가정부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인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7개월 사이에 대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재봉이 휘두른 도끼에 맞은 것은 전혀 다른 대대장과 그 가족이었다. 이때 죽은 대대장 이득주 중령과 그 의 아내는 또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6.25 때 한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지리멸렬 후퇴할 때의 일이다. 동부전선에서 선전했지만 서부전선이 붕괴되면서 후퇴한 6사단 7연대 2대대는 충북 음성 근처에 주둔 중 숨이 턱에 닿은 여교사의 방문을 받는다. "이북 군인들이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있어요." 인민군들이 동락국민학교에 진을 치는 것을 보고 수 킬로미터의 산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2대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서 동락국민학교에 모인 인민군을 공격한다. 기습을 당한 인민군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고 이는 국군의 첫 대승리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을 내리며 기뻐한다. 이 사연은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거니와 당시 2대대의 소대장은 용감한 여교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에 골인하게 됐는데 바로 이들이 고재봉의 도끼의 희생양이 된 이득주 중령 부부였던 것이다.
전혀 엉뚱한 사람들을 죽인 뒤 다이아 반지 등을 훔쳐 나왔던 고재봉은 그 다이아 반지를 팔아치웠다가 꼬리를 밟히고 결국 땅콩 장수의 눈에 띄어 신고되고 체포된다. 사람 여섯 명을 삽시간에 죽여 버린 사람답게 그의 포학성은 도를 넘었다고 한다. 감방에 들어가서 신고식은커녕 "여섯 명 죽이나 한 명 더 죽이나 똑같다."의 포스를 발휘하면서 감방의 우두머리로 군림했고 대체 어떤 놈인가 보자고 감방 안을 엿보던 교도소장 눈을 찔러 버리는 왈짜였다고 하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하지만 대개의 스토리처럼 그 역시 사형을 당할 때는 지극히 선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게 주님의 은혜든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이든 관계 없이 어쨌던 살인마 고재봉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저승에서라도 그분의 부하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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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감자탕
11월 13일은 다른 얘기를 할 겨를이 없다. 재탕삼탕이라도 이 날은 이 사람을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보신 분들은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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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평화시장에서 40년째 장사를 해 오고 있다는 모녀식당이란 곳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모녀식당이라 이름붙긴 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열 여덟에 장사를 시작해서 이제는 귀밑머리 희끗해진 딸이 평화시장 `터줏마님'으로 가게를 지키고 계셨지요.
가게래야 한 다섯평쯤 되는 허름한 시장 식당. 4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곳에서 파는 감자탕이 신통방통해서라기보다는 시장 사람들이 그냥 단골로 와 먹다가 연륜만 쌓인 곳이었기에 정말 촬영할 게 없는 집이었습니다. 거기다 동대문시장 최대의 불황기였다는 해에, 의류 상가들로서는 `농한기'에 해당한다는 한여름 저녁이어서 감자탕 먹으러 오는 사람도 드문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이 아이템을 펑크를 내고 회사로 들어갈까 어쩔까 고민고민하는 중에, 어떤 생각이 스쳐서 심드렁하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여기서 40년 하셨다고요?"
"예"
"전태일도 아시겠네요?"
"태일이? 알죠. `진단골'(단골 중의 단골)이었는 걸요."
그때 제 눈은 동태 눈에 갑자기 보석이 날아와 박힌 듯 했을 겁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마지막 절규를 남긴 채 불길 속으로 사라졌던 그 이름의 실체를 익히 경험한 사람과 처음으로 조우했으니까요. 이미 일상의 인물 아닌 역사적 인물이 되어 버린 전태일 열사가 단골로 다녔던 식당에서 내가 서 있다는 자체가 무슨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 뭡니까.
촬영을 제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전태일 열사 얘기를 해 달라고 청했지요. 아주머니는 태일이는 지금도 얼굴이 생생해!라는 말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조기 저 자리에, 잘 앉았었어요. 일 끝나고 와서 감자탕 한 그릇 먹고. 참 맘이 좋았어요. 시다들 데리고 와서 자기는 안먹고 애들 사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한 그릇 슬쩍 더 주니까 끝까지 배부르다고 안먹어. 그래 난 정말 밥 먹은 줄 알았어요. 근데 그 사람도 저녁 먹은게 아니었어요. `시다' 애들한테는 자기는 밥 먹었다고 그랬는데 (내가) 준다고 덥석 받아먹으면 애들 무안해할까봐 그랬다는 거야 나중에. 그래서 내가 에이 바보야 그랬거든.”
고(故)전태일은 '바보회'라는 이름의 소모임을 조직했었지요. 그들을 보호해 줄 법이 존재함에도 그를 몰랐던 `바보'들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지요. 하지만 문득 저는 바보회의 이름이 혹시 아주머니의 타박인 `에이 바보야'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바보, 바보'를 중얼거리는데 아줌마가 얘기를 계속하셨습니다.
"태일이가 편지 써서 신문사에도 보내고, 관청도 찾아가고 하는 건 알았어요. 그때 시대가 좀 무서운 시대였어요? 괜히 내가 걱정이 되어서 마침 태일이가 왔길래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지요. `야 이 바보야. 네 일이나 걱정해'라고 타일렀어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내일이면 결판이 난데요. 결판은 뭔 결판? 그러고 말았는데 다음날 점심 끝나고 였나? 누가 와서 태일이가 죽었다고 불타 죽었다고 엉엉 울더라고요. 난 그때 불타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공장에 불이 나서 죽었나 했지요"
1970년 11월 13일. 젊은 날의 아주머니가 저녁나절의 감자탕을 위해 뼈다귀를 다듬고 있을 무렵에 한 청년은 그 죽음을 헛되지 말라며 몸을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도 피곤에 지친 노동자들은 감자탕 한 그릇으로 등에 달라붙은 뱃가죽에 윤기를 불어넣었겠죠. 그로부터 30년 뒤의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 어느 손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여기 맛이요? 뭐 맛보다도 우린 이 냄새 맡으면서 큰 사람들이에요."
그 분 역시 청계천 재봉사 출신의 상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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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14일 한 문제적 인간의 출현
1917년이 왔을 때 경상북도 선산의 한 깡촌의 중년 여성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쭈그리고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 사립문 밖을 왔다 갔다 하여간 무슨 큰 고민을 들처업은 사람 같았다. 이윽고 뭔가 결심한듯 잰 걸음으로 장독대로 향한 중년 여성은 장독 뚜껑을 열고 간장을 한됫박 푸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나오고 토악질이 멈추질 않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간장을 들이부었다. 이유는 매우 심각한 듯 하지만 또 우습기도 했다. 마흔 다섯의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이미 아이라면 여섯을 세상 밖으로 내놓았고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며느리가 하나도 아닌고 둘씩이나 집안에 좌정하고 있었다. 그런 판에 며느리들 태기 살펴야 할 시어머니 자리가 덜커덕 임신을 해 버린 것이다. 배는 불러 오고 그 사실을 알게 될 동네 사람들이 웃음 참느라 곤욕 치르는 풍경이 눈에 삼삼하고 “어머님 홀몸이 아니시네요.”소리 듣고는 도저히 못살 것 같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간장을 들이키고 있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도 대단한 뚝심이었다. 그 독한 간장을 들이붓다가 끝내 이 가련한 시어머니가 졸도했음에도 아이는 무럭무럭 커 가고 있었다. 오냐 너만 독하냐 나도 독하다. 더욱 필사적이 된 시어머니는 언덕 위로 올라가서는 몸을 날렸다. 쿵 소리가 나면서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시어머니는 데굴데굴 굴렀지만 그래도 뱃속의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질긴 생명이로구나. 웬만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이 시어머니도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비장의 수법으로 택한 것은 디딜방아. 비장한 표정의 시어머니는 디딜방아를 안고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꿍~~~~~
이 장렬한 애 떼기 투쟁의 전말은 조갑제 대기자가 전해주는 것이니 사실과 착오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별의 별 시도에도 불구하고 뱃속의 아이는 의연하게 커 갔고 달 수를 채워 태어났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아이의 이름은 ‘정희’로 붙여졌다. 형 이름은 동희 상희 등인 박씨 가문의 막내. 바로 박정희였다.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적지는 않겠다. 요즘은 특히 그의 일생이 수십만 사람들의 입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재연되고 있는 참이고 그의 일생을 두고 팔뚝질이 벌어지는 일도 흔한지라 거기에 굳이 더 보태고 싶지는 않은 탓이다. 어쨌건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18년이라는 기나긴 지위에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그것이 그의 덕분인지 그이기 때문에 문제였던 건지도 얘기하지 말자. 피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 뱃속의 태아의 생존 의지만큼이나 그의 권력 의지 또한 확고했다. 아이들 잘 가르치고 살다가 큰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로 떠난 것이나 거기서 진충보국 혈서 쓰고 일본 육사에 간 것이나, 남로당원이 되어 군 총책을 맡은 것이나, 부정부패에 분노했으나 결국은 “가장 불행한 군인” (본인의 표현)이 된 것 모두는 권력을 향한 의지였다. 그의 사상을 의심하는 강원룡 목사에게 미국 CIA 요원이 해 줬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목사님. 박정희 빨갱이였습니다. 우리 알아요. 하지만 걱정 안합니다. 저 사람에게 중요한 건 이념이 아니라 권력이거든요. 권력 잡기 위해 이념도 선택했던 거거든요.”
아무튼 그는 그렇게 살다가 갔다. 나는 그를 나쁘게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정도의 인물은 원래 당대에는 평가가 어려운 법이다. 그 때문에 죽고 병신되고 미친 사람들의 한이 아직 잔설처럼 남아 있고 그의 치세를 몸서리치는 추억으로 돌아보는 사람도 많은판에 사실 객관적인 평가란 무망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서 그 관대함을 일단은 포기한다. 그가 이 나라를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는 이 나라의 질곡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14일 그의 ‘탄신일’을 맞아 대구신문에 실렸던 기사다.
“14일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박대통령의 88회 탄신일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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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1월 15일 마지막 황제 부의 즉위
북경에 가면 만리장성만큼이나 꼭 들르게 되는 곳이 이화원이다. 그 넓디넓은 호수와 그 주변에 솟은 산들이 사실은 사람의 손으로 파헤친 자리에 물을 붓고 그러다 나온 흙을 쌓아올려 만든 인공 호수와 인공 산이라는 사실에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경복궁 하나 짓기 위해 난리 블루스를 쳤던 우리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부러워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이 호수를 만들고 산을 쌓아올리다가 도대체 몇 명이 지쳐 쓰러져 죽어갔겠으며 그들이 흘린 눈물이 저 호수의 물에 비해 적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이화원 곳곳에는 색다른 구경꺼리들이 많은데 그 중의 한 곳은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황제인 광서제의 동계 유폐지였다는 옥란당이다.
나이 스물이 훨씬 넘도록 이모 서태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황제는 자신의 권
리를 되찾고 또 날로 병들어가는 나라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를 도왔던 것이 강유위 등 변법자강운동가들이었고, 나이 스물 일곱 살 때 무술변법을 일으켜 한 번 나라를 바꿔 보려고 했지만 서태후를 위시한 보수 세력의 반격에 여지없이 참패하고 만다. 그는 이후 서태후의 철저한 감시 속에 답답한 여생을 보냈는데 1908년 11월 14일 갑자기 죽는다. 그리고 서태후도 그 뒤를 따르듯 세상을 떠나는데 이 가련한 황제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21세기에 정밀검사를 해 보니 독살이 맞았다는 설도 전한다. 아무튼 황제가 죽었고 그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대청제국을 실질적으로 망하게 했던 (여자가 대빵된다고 좋은 거 하나도 없다) 서태후도 죽었다. 죽기 직전 서태후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지명한 것이 부의였다. 영화 <마지막 황제> 그대로다.
1908년 11월 15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진시황 이후 이어온 중국의 오랜 제정(帝政)의 마지막 주인이 제위에 올랐다. 즉위식 때 하도 울어제껴서 그 아버지 순친왕이 “조금만 기다려라 곧 끝난다 곧 끝난다.”고 달랬는데 그걸 들은 이들이 몹시 불길하게 여겼다더니 아니나다를까 그가 아기 티를 채 벗기도 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는 멸망한다. 더 이상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물론 자금성에서 생활했고 새로이 들어선 중화민국으로터 예우는 받았지만 말이다. 그 후 그에게 밀어닥친 풍운은 <마지막 황제>에도 대충 나오니 (안나오는 부분도 많지만) 역시 그냥 넘어간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에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황제로, 다시 전범으로 포로가 되고 수용소에서 교화를 받기까지 그의 일생은 황제에서 죄수까지 인간사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오간 드라마탁 그 자체였다.
영화에는 그에게 영향을 준 교도소장이 나온다. 혼자 씻기는 커녕 신발끈조차 매지 못하던 부의로부터 그 시종들을 떼어내고 부의 스스로 할 것을 명령하고, 독립심을 가지라고 윽박지르던 교도소장 그는 김원이라는 이름의 조선족이었다. 그에 따르면 부의는 스스로 문고리도 잡지 못해 헝겊을 대고 문을 열었고 가끔 있는 목욕 시간,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여 탕안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단 누가 먼저 몸을 담근 경우는 절대로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생 물 속에 누구랑 같이 있은 적은 없고 누구의 몸이 닿은 물을 써 본 적도 없었다니 당연한 노릇이었겠지만.
출옥 후 그는 그야말로 평범한 삶을 산다. 만주족 2백만의 대표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도 지냈지만 그의 직업은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였다. 그는 그 직에 임명됐을 때 “황제가 됐을 때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고 한다. 허공에 매여 있던 발이 땅에 닿을 때의 느낌이었을까. 쉰을 넘은 부의는 식물원의 민병 (民兵 - 군중 조직의 일종)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황소 고집을 부려 그 일원이 되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교도소장 김원이 닦달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군중들에게 몇 마디 호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김원이 홍위병들에게 시달릴 때 부의 역시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부의는 이때 병이 위중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병원 의사 멱살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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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17일 우당 이회영 그 큰 이름 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하였다. 이 일을 어찌 하는가. "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적을 죽이라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 실로 귀티가 나는 서른 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회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가문에서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의 후예였고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몽땅 보유했던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고 그 신임장을 몰래 빼돌려 간도의 이상설에게 전달했지만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이 되고 3천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잰걸음을 하던 그들은 바로 이회영의 가족들이었다. 이회영과 그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형제들이 지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나라를 회복할 무장 항쟁의 군자금으로 그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가족 아닌 왕년의 이씨 가문의 노비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노비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는 주인들이 큰일을 한다는데 어찌 우리가 따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배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회영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 주시오.” 뱃사공은 이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건너간 만주에서 그들은 가지고 나온 재산을 털어 '경학사'를 세운다. 밭 갈면서 공부한다는 그 뜻처럼 구국계몽운동 이념에 입각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그 부설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를 건립하는데 경학사는 곧 문을 닫지만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외 모든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 밑빠진 독에 퍼부어진 물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재산이었다.
일본과 그 압력을 받은 만주 군벌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옮긴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없이 이회회영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이회영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이회영의 호)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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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그리고 꽃상여 타고
1985년 2.12 총선 뒤 ‘선명야당’ 신민당이 등장했지만 전두환의 폭압 통치는 여전하던 시절, 점차 전두환의 입김을 닮은 된바람이 살갗을 때리기 시작한 즈음의 어느 날,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186 명의 학생들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남녀불문 비장한 표정의 학생들은 간단한 지침을 전달받고 그들이 그날 해야 할 행동에 돌입했다. 그 가운데에는 후일 유서 대필 사건으로 한국의 드레퓌스가 된 강기훈도, 호방한 입담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 정봉주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가락동 민정당 중앙연수원이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봄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의 인원이 민정당 중앙연수원을 향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쉽사리 정문을 돌파한 그들은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무지하게 넓었던 연수원을 점거하려면 정문에서 강당까지의 기나긴 거리를 전력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전경이 쫓아오고 점거해야 할 강당은 겁나 멀고,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 나가는 달리기 끝에 학생들은 점거에 성공했다. 성을 빼앗았으면 수성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지키려고 성을 빼앗은 게 아니라 상징적인 점거였고 성을 지킬 무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시간 안에 연행 대열로 끌려가는 것을 예상했는데 행주산성에는 돌이 있었듯 연수원에는 뜻밖의 무기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생수통이었다. (전 말지 기자 신준영이 쓴 80년대 학생운동 야사에서 봤음)
생수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민정당 어르신들은 수돗물과 차별되는 생수를 즐긴 것 같다. 그 꽉찬 생수통과 생수병들은 학생들의 짱돌이 됐다. 전경들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물병 세례에 곤욕을 치르며 학생들을 진압해야 했다. 3-40분 끌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농성은 무려 3시간을 끄는 ‘대첩’을 이룩했다. 대첩을 이룬 만큼 연행자들에 대한 대접도 혹독했다. 우선 연행자 전원이 구속됐다. 미문화원 사건 때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고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에도 “개전의 정이 역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도 베풀었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뛰어내리다가 허리를 다친 학생까지 짤없이 구속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상이 걸린 것은 검찰청이었다. 검사의 손이 모자란 것이다. 공안부 인력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검찰은 일반 검사들까지 차출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현장에 동원된 강력 형사 이야기는 허투루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대량 구속의 경험은 1986년 10월 28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라 쓰고 ‘건대항쟁’이라 읽는 사건에서 1천2백명이 넘는 구속자를 너끈히 소화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낳은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88년 서울의 어느 대학에 들어간 한 신입생은 학기초 생일 파티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라면 한 그릇 얻어먹은 적이 없는 구두쇠 87학번 (지금 페친이다)이 여자 신입생에게 푸짐한 꽃다발 하나와 자기 키만한 인형을 선사한 건 황당하긴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황당한 것은 불이 꺼진 뒤에 울려퍼진 희한한 노래였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숲 사이로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 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노래가 끝난 후 선배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85년 경의 어느 날, 생일파티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또 다른 생일 파티가 열렸다고 했다.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한 사람의 생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자리는 생일 파티답지 않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을 맞은 83학번은 바로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하게 되어 있었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다른 곳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 자리는 대학 시절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술자리이자 생일 파티였던 것이다. 별안간 누군가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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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19일 하디타 학살
바그다드의 북서쪽으로 차를 달리면 서울에서 문경 정도 되는 거리의 도시 하다티. 이라크라는 나라가 미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미군이 순찰을 돌고 점령군 행세를 한 것은 하다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군이 순찰 도중 사단이 발생했다.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져 미군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한 것이다. 미군 해병대 당국자는 이렇게 발표했다. “현지 주민 15명과 미 해병 1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이날 폭발은 해병 순찰조와 이라크군을 노린 것이다. 또 폭발 직후 무장괴한들이 해병대를 겨냥해 총기를 난사했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적어도 8명의 저항세력이 사살됐다.”
그런데 뒤이어 밝혀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동료 1명을 잃은 미군들은 눈이 돌아 버렸다. 그래서 지나던 택시를 세워 그 승객들에게 총격을 퍼붓고 인근의 민가를 습격해 어린아이고 여자고 그 머리와 등에 대고 탄창을 비워 버렸다. 당연히 수류탄도 곁들여졌고...... 일대 화력이 퍼부어졌다. 결과는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은, 즉 교전 중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처형식으로 총을 맞은 시신들 스물 네 구가 병원에 실려 온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도가 터져 나오자 당연히 조사단이 파견됐고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그 가운데 몇 명은 ‘컬레트럴 데미지’ 즉 부수적 피해로서 무고한 민간인이지만 나머지 몇 명은 무장 세력으로서 민간인 행세를 하면서 미군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부수적 피해(?)를 입은 몇 명에게는 우리 돈 2백 - 3백만원 정도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그나마 24명 중 15명이었을 뿐, 나머지는 ‘무장 세력’으로서 당연한 작전 중 전과(?)로 치부돼 버렸다.
세월이 흘렀고 고발도 있었고 폭로도 만발했다. 미군도 관련 병사들을 조사를 벌였다. 장교 4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이 기소됐지만 중대장을 포함해 6명은 기소유예로, 1명은 무죄로 석방됐다. 재판까지 간 사람은 사건 당시 현장을 지휘했던 분대장 1명이었다. 그에게 2012년 1월 내려진 형벌은 24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의 혐의자치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등병으로 강등, 최대 90일 구금, 3개월 감봉.’ 그나마 이 하사관은 ‘직무태만’ 혐의를 인정한 댓가 - 이걸 폴리바기닝이라고 하던가- 로 구금조차 면했다.
이쯤 되면 미군의 만행과 오만과 잔학함에 치를 떨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이런 개새끼들이 있는가.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끌어대어 이라크의 석유를 노려 전쟁을 일으킨 조지고 부시고 2세의 잔학함은 백번 나무라도 모자란다. 양키들의 잔인함과 그 피에 굶주린 만행을 규탄하는 것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얼마나 미친 놈들의 만행인가.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부정할 수도 없다, 미국은 이 원죄를 뒤집어써야 한다. 그 죄는 미국인들의 후손들이 두고 두고 갚을 것이다.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저주했듯이 그 핏값은 그 후손들이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도발적이 되어 보자.
희생자들이 양민이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비정규전이 펼쳐지고 있는 이라크였음을 상정해 보자. 여덟살 꼬마가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아주머니가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미군들 여럿을 날리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미군들도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미군의 만행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미군들도 인간이고 공포에 질릴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할 따름이다. 그런 비극이 수시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침략군이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자신의 아들만한 아이가 언제 자신에게 수류탄을 까 던질지 모르고 호의를 베풀었던 친구가 폭탄을 두른 채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는 인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이니까.
전쟁은 그런 거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공포가 전쟁의 기둥이며, 내가 저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는 것이 전쟁의 서까래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을 치른 우리는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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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의 시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멕시코에는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 출몰했던 선글라스 낀 ‘불행한 장군’ 과 매우 닮은 꼴인 대통령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아스. 그는 1877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 30여 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일찍이 독재자 산타 아나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게릴라의 일원이기도 했던 디아스는 멕시코를 바꿔 놓은 동시에 정체시켰다. “조국근대화를 강조하는 디아스의 30년 통치 기간 중 전국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깔리고, 금은의 생산이 급증하고, 석유가 개발되었으며, 해외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국가 경제의 핵심인 제조업과 무역 부문이 급성장했으며, 무엇보다도 정치적 안정이 주어졌다.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은 전설적인데, 독립 이후 디아스의 취임 전까지 55년 동안 36명이 통치하면서 무려 75회의 대통령직 교체가 발생했었다.” (백종훈 칼럼,멕시코 혁명의 빛과 그림자 http://jgback.gnu.kr )
그러나 디아스의 통치는 “혜택을 누리는 극소수에게 천국이었지만 토지를 빼앗긴 다수 국민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디아스라는 빽을 둔 대농장들과 외세의 자본은 해마다 풍년가와 해피송을 불렀지만 멕시코의 대다수 민중들은 죽도록 일해야 할 뿐이었다. 디아스라는 돌이 내리누르던 멕시코라는 솥단지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마침내 그 뚜껑이 펑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날이 왔다. 1910년 11월 20일.
박정희 대통령도 유신 말미에는 몇 년 뒤엔 물러나서 영남대학 총장이나 할까보다 운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이 디아스도 그랬다. 1908년 미국의 한 언론에 “이제 멕시코는 민주주의할 때가 됐다.”고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언명했던 것이다. 드디어 디아스 시대가 끝나는구나! 정치적 열기가 들끓고 새로운 희망들의 그림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디아스는 또 박정희처럼 마음을 바꾼다. “나 아니면 안돼!” 그리고 1910년의 재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그에게 결연히 맞선 이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해외유학생 출신의 프란시스코 마데로였다. 그는 “재선반대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하고 재선 반대와 실질적인 참정권의 확립을 외친다. 그런데 디아스는 역시 박정희와 비슷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데로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다. 그 뒤 가석방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지만 탈출하여 “산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발표한다.
“자유와 정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민중들,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요구할 역사적 순간 앞으로 끌려나왔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에서 그는 외세의 배제, 농지 개혁, 노동조건 개선을 소리 높여 주장한 마데로는 멕시코 인들에게 봉기의 날을 공표한다. 1910년 11월 20일 .
1910년 11월 20일 리오그란데에서 치아파스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북쪽의 농민군 지도자 판초 비야, 남쪽의 농민혁명군 수장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만데로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어났고 기타 지역에서도 소작민들의 봉기가 잇달아 디아스 정부군을 무찔렀다. 특히 1911년 5월 판초 비야의 농민군은 미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후아레스 전투에서 정부군에 완승을 거둬 디아스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결국 디아스는 30년 정권에서 손을 떼고 망명길에 오르고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 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개혁 앞에 우유부단했고 그가 외친 구호들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달팽이처럼 행동했다. 토지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사파타는 마데로를 떠났고 반혁명 세력은 그를 고립시켰다. 미국 대사 헨리 윌슨도 끈질기게 그 행로에 간섭하여 마데로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다. 마데로는 멕시코 사람들을 깨우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왜 자신이 그들을 깨웠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자멸해 갔다. 그는 반혁명 반란군과 내통한 자신의 국방부 장관에게 암살된다.
판초 비야는 마데로에게 감화받아 그에게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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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21일 IMF와 참 더럽게 착한 백성들
내 초년의 기억이 박정희 ‘유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면 성년의 기억의 분수령은 결혼이나 취직 등등보다는 알파벳 세 개로 정리될 거 같다. IMF. 이 세 알파벳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한국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달라져 있었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대한민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한국 경제의 푼더멘탈은 튼튼하다”고 우겼던 푼수 비슷한 부총리는 경질됐고 며칠 전 한국이 IMF에서 수백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에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던 한국 정부는 결국 IMF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그 밤 임창렬 부총리의 상기된 얼굴과 경직된 목소리는 기억에 생생하다. 연초부터 한보가 부도나고 진로가 무너지고 해태가 나가떨어지고 기아마저 붕괴되는 연쇄 부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 불안 하면서도 그래도 뭔 일이 나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 마음 추스르던 한국의 서민들 위로 별 구멍이 없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임창렬 부총리의 담화문의 일부를 다시 들어본다. “IMF는 과감하고 강도 높은 개혁 조치를 주문했고 정부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속도의 개혁과 구조조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 이러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가안정과 국제 수지를 위한 긴축 재정 정책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성장률 하락으로 실업이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부담은 위기에서 회생하기 위한 비용이자 국제 사회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댓가입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직장마다 회사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달아났고, 수십 년 몸 바쳐온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졌고, 월급이 깎이고 무급 휴직이 돌아가며 시행됐으며 숱한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들은 새로운 험로를 모색해야 했고 그 살얼음판을 걷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벼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 기억해야 할 것. 솔직히 한국 사람보다 일을 열심히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주관적인 평가다) 그리스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며 시위를 벌였다. 화염병이 날았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으며 자신들에게 가해질 ‘고통과 부담’에 저항했다. 그것의 정당성을 찬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IMF를 맞는 우리의 자세”가 너무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온순했다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과장님 (사장님 기사)이 인사를 오셨어. 사장님을 20년 모신 분이고 기사만 한 게 아니라 회사 관리직도 함께 하셨어. 몇년 동안 나보다 늦게 오신 적 한 번도 없었고 빨리 가신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분이 잘들 지내라고 인사를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 사장님도 속이 안좋으셨는지 나와 보시지도 않았어. 여직원들 다 우는데 그분은 웃으셨어.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울지들 말라고.” 눈이 빨개져서 왔던 아내의 푸념이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정든 직장에서 내팽개쳐지면서도 의연히 웃었다. 웃지 못하더라도 당시 제일은행 직원들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남은 분들의 건투와 우리 은행의 건승”을 기원하면서 비디오를 찍었다. 누가 이 사태를 불러왔는지,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항의는 실종됐다. 종교적 의미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는 고백은 거룩하지만 사회적으로 그 고백이 강요될 때 그것은 죄악이다. 그것도 가장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지워지는 상황에서는. 외환 위기의 시발점이라 할 한보 사태에서 “머슴이 뭘 알겠습니까?”라고 뇌까리던 정태수같은 개새끼들은 그래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죽을 힘을 다해 그 곳간을 채워 주던 머슴들은 “나만 그런가 뭐.” 하면서 물러섰다.
그뿐인가. 그 외환 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사람들은 금모으기에 나선다. 애들 돌반지에 결혼 반지,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패물까지 장롱을 박박 긁은 금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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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835년 11월 30일 오스카 와일드, 마크 트웨인
밤샘 일하는 와중에 몇 자 끄적인다. 영화 '더 롹'을 본 사람들은 그 멋있음이 절정에 달했던 노배우 숀 코네리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 가운데 명장면 중의 하나가 부하들의 희생을 저버린 조국에 미사일을 겨눈 험멜 장군이 알카트라즈 탈출에 성공했지만 붙잡혀 오랜 옥살이를 했던 영국 첩보원 메이슨과 나누는 대화다. 험멜 장군이 먼저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키워진다. 토머스 제퍼슨”이라며 스스로의 행위를 미화하자 메이슨은 영국인 특유의 냉소로 이렇게 되받는다. “애국이란 보통 악한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요 장군.”
게으르게도 나는 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잊기 힘든 동화를 쓴 사람이다. 죽어서 동상이 세워진 뒤에야 오지랖이 눈물 날 만큼 넓어진 왕자와 그 오지랖을 감당하며 왕자의 동상에 박혀 있던 보석들을 부리로 떼어 가난한 이들에게 실어 나르다 끝내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지 못하고 동상 아래 떨어져 죽어야 했던 제비의 이야기는 언제 다시 생각해도 가슴에 화기(火氣)를 당긴다. 자신의 눈까지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 달라는 왕자의 청에 응한 제비는 그예 그를 떠나지 못하고 왕자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왕자에게 전하며 살다가 왕자의 발치에 떨어져 죽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일종의 연대였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고 전염되며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감동하며 놓지 못하는 손들이 빚어내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의 하나. 그래서 동화 속에서 천사는 그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왕자의 깨진 심장과 제비의 시체를 꼽고 그를 들고 하느님 앞에 갔으리라.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자주 인용되는 그의 아포리즘들을 보면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들이 많다. “영혼은 늙게 태어났으나 젊어져 간다. 그것은 인생의 희극이다. 그리고 육체는 젊게 태어나서 늙어간다. 그게 인생의 비극이다.”는 말 앞에서 나는 싱긋 웃는다. 지금도 옛 학교에 가면 족구하자고 아이들 불러 낼 것 같은 마음이지만 대학 4학년 때에는 되레 애고 몸이 전같지 않다는 둥 시건방을 다 떨었었던 것도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이는 들수록 마음은 젊어가고 마음이 젊을수록 몸은 쭈글쭈글해지는 게 인간사의 이치인가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들으면 그건 동서고금에 똑같은 것 같고.
1900년 11월 30일 오스카 와일드는 세상에 떠났지만 그로부터 65년 전 1835년 11월 30일은 한 탁월한 문학가가 세상에 왔다. 그 이름은 새뮤얼 클레멘스였지만 그는 측량기사 노릇을 하던 시절 얻었던 별명 마크 트웨인을 평생의 필명으로 사용한다. 그의 작품들은 내 어린 시절의 일부를 생생히 구성하고 있다. 온 마을을 골탕먹이던 톰 소여의 장난기와 허클베리핀의 모험도 물론 그렇지만 나에게 마크 트웨인은 사회적 모순(?)을 처음으로 알려 준 작가였고 사람에게 사람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작가였다.
<왕자와 거지>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온다. 쌍둥이처럼 닮은 톰 칸티와 옷을 바꿔 입는 바람에 졸지에 거지가 되어 거리를 누비게 되는 왕자 에드워드는 동료(?) 거지가 훔친 새끼 돼지를 떠안기고 도망가는 바람에 붙잡혀 도둑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 재판장은 새끼돼지의 주인인 여자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부인 이 아이를 교수형 받게 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여자는 화들짝 놀란다. “아니 이만한 일로 이 아이가 교수형을 당해요?”
판사는 설명한다. “그게 법입니다. 훔친 물건이 6펜스 이상이면 교수형을 받지요.”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크게 저으며 그럴 수는 없노라고 자신이 새끼돼지 가격을 그 이하로 적겠노라 대답하고 서명한다. 그런데 이를 본 경찰관이 그녀의 뒤를 따라붙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머니 이 돼지 내게 3펜스에 파시오.” “아니 이 양반이 내가 10펜스를 주고 산 걸 어떻게 3펜스에 팔아요?”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부치자 경찰은 엄숙하게 말한다. “당신 판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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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 쿠바 상륙
스페인에서 쿠바로 온 이주민이었던 앙헬 카스트로는 풍족한 지주는 못되었지만 그런대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부였다. 이 앙헬 카스트로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스페인 남자였던 모양이다.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결혼 생활 중 가정부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였으니까. 그는 이 바람기로 인해 20세기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을 세상에 내놓는 행운(불운?)아가 된다. 그 5명의 사생아 가운데 둘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막내의 이름은 라울. 지금 세계 최장수 국방장관 (근 50년째!)인 바로 그다.
언젠가 80을 훌쩍 넘은 피델 카스트로가 한국과 일본의 WBC 야구 결승전을 보면서 봉중근이 일본에 노출된 것을 한국의 패인으로 지적하면서도 그 경기 내용에 경탄을 금치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실력도 꽤 괜찮아서 뉴욕 양키즈에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었다고 하는데 그를 불합격시켜버린 뉴욕 양키즈로서는 두고두고 미국 턱 밑의 종기가 될 위인 하나를 낫질할 기회를 박찬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가 됐고 쿠바를 숫제 자신의 영토로 치부하는 미국과 그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는 혁명 투사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천재적이거나 레닌처럼 치밀한 사람이 못되었다. 야구로 치면 그는 일단 휘두르고 보는 타자였고 번트 따위는 댈 생각 없이 치고 달리는 히트 앤드 런 신봉자였다.
1953년 7월 26일 소규모 군중을 이끌고 대담하게도 몬카다의 정부군 병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투수 류현진의 공을 레프트 담장으로 넘기겠다고 배트를 휘두르는 리틀 야구 선수 같았다. 당연히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 쿠바의 소농 85퍼센트는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늘 계약 해지를 통고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비옥한 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의 손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오리엔테 지방에서도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해안가 토지 대부분은 미국 과일회사와 서인도제도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부조리합니다.(…)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유명한 열변으로 이 혁명의 리틀 야구 선수는 일약 혁명 야구팀의 유망주로 부상한다. 15년 징역을 선고받지만 그나마 여론의 압력으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절치부심 새로운 기회를 노린다. 그는 멕시코에서 그의 강력하지만 컨트롤 안되는 강속구를 받아 줄 멋진 배터리를 만난다. 바로 체 게바라가 그였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피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체 게바라)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 동료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부터 맹훈련을 받으며 혁명의 구질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1956년 11월 멕시코의 한 해변으로부터 그란마 호라는 오래된 배에 오른다. 정원이 20명이 될까말까한 배에 82명이 올라탔고 FBI와 멕시코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장 불편한 항로를 택한 이 신흥 혁명 야구단은 일주일이 넘는 항해 동안 거의 초주검이 된다. 그들의 배 ‘할머니’ (그란마)는 쿠바 땅을 눈앞에 둔 산호초 지역에서 좌초하고 말았고 이 풋내기 혁명 야구단은 일동 입수하여 헤엄을 죽을 듯이 쳐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이었다.
허구헌날 삼진 아웃을 당하고 알이나 까던 혁명 야구단이 마침내 1루 베이스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시원한 안타를 친 것이 아니라 내야 안타를 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서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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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3일 다대포의 두 간첩
1983년 12월 4일 아침의 학교 교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그 돼지띠 해는 정말이지 시끄러운 한 해였다. 소련군에 의해 대한항공기가 격추됐고 아웅산에서는 북한이 전두환을 노린 폭탄을 터뜨려 외교 사절들이 죽었다. 그런데 12월 4일 아침이 소란했던 것은 바로 전날인 12월 3일 우리가 사는 도시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다가 잡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문제의 장소는 다대포라는 곳이었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바로 지난 여름에 신나게 헤엄치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생포된 간첩은 두 명. 전충남 이상규라고 하는 이름이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그들의 모습은 수없이 반복되어 방송되었고 그 생포의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식(?)은 구덕운동장 (사직 이전 부산의 최대 규모 운동장)에서 요란하게 개최E됐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보도에 따르면 해안가를 지키는 방위병들이 공비를 때려잡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아니라 공비가 올 줄 알고 해안가에는 특수부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고도로 훈련된 무장공비를 제압한 실력은 방위병 아닌 특수부대원들의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실 내가 봐도 우리 옆집 방위 아저씨같은 사람들이 어마무시한 특수공작원의 덮치고 팔을 비틀고 무장해제하는 전광석화를 실현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수수께끼는 20년 뒤에야 풀렸다.
중앙일보 2003년 9월 25일자에 따르면 대한민국 공식 군인 명단에도 없는 특수부대원들 은 그 해 11월 초부터 이미 해안가로 침투하는 대상을 제압, 생포하는 훈련을 피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치질도 하지 못했고 비누도 금지됐다. 그렇게 한달을 반복한 뒤 그들은 부산으로 향했다. 휴게실 사용이 금지된 채 갓길에 오줌 눠 가며 도착한 부산에서 그들은 임무를 하달받는다. 고정간첩과 접선하는 무장공비들을 생포하는 것. 접선장소는 다대포 해안 근처의 공중화장실이었다고 하는데 특수부대원들은 그 퀴퀴한 곳에서 숨죽여 간첩들을 기다린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고 대원들은 둘을 제압하고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면 대원들 역시 죽은 목숨에 가까웠다. 인근에는 공수부대 1개 대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53사단 병사들 1개 연대가 완전무장하고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누가 공비인지 누가 특수부대원인지 모를 상황에서 생포작전이 실패했더라면 특수부대원 역시 벌집이 되어 백사장에 쓰러져 공비 일당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 중의 하나를 하는 5년 뒤에 먼발치에서나마 만났다. 전충남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문무대에 나타나 고려대 1학년생들에게 반공 강연을 했다. 문무대 입소 첫날 문무대장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개겼던 탓에 일반 교육 과정에서는 큰 물의 없이 진행하던 (마지막 날은 사단이 났지만) 중이었기에 별다른 시비 없이 강연을 끝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강연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충남이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곯아 떨어져서 강연 후 의례적으로 쳐 주는 박수 소리에 깨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문무대에 들어갔던 모학교 1학년들은 더 과격했던 모양이다. 전충남이 강연할 때 약간의 소요가 있었던 것이다. “저 새끼 어용이다!!!”고 누군가 고함을 지르고 야유도 터져 나와서 그렇게 순탄하게 강연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모 학교 1학년생 중의 한 명이었던 사촌형의 전언에 따르면 강연 후 전충남과 조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충남은 슬픈 얼굴로 이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학생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임다.”
사실 그도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그라서 남쪽으로 오고 싶어 왔을 것이며 완전히 노출된 허당 작전의 희생양이 되어 ‘적’에게 체포되어 또 다른 인생을 억지로라도 살아내야 했던 그 젊음은 또 얼마나 고역이었을 것인가. 북에 남아 있을 그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반공 강연을 하고 다니는 그는 북에 남은 가족들의 얼굴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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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6일 어느 천재의 기묘한 일생
1945년 12월 7일 조선일보의 한 귀퉁이에 짤막한 다섯 줄짜리 부고가 실렸다. “윤치호씨 병사(病死). 송도중학 설립자 윤치호씨는 (12월) 6일 오전 9시 개성 고려정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았다.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후 3시 송도중학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윤치호가 죽었다. 나이 여든 둘. 그 80 여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과에 소년 급제할 만큼 영민했지만 서자 출신이라 무척 서러움을 받았던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난 윤치호. 그의 나이 열 세 살에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렸다. 굳게 닫힌 문호를 억지로 열어젖힌 것은 일본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일제히 조선 땅에 공사관을 세웠고 새로운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청년 윤치호는 이 신문물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가진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선 천지를 벗어나 존재하는 생판 새롭고 거대한 세상의 공기를 마신다. 이렇게 생소한 경험을 한 인간들은 대개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 새로운 것에 열광하긴 하는데 돌아와서는 깡그리 잊어먹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는 사람, 역시 머리를 싸매기는 하는데 우리는 안될 거야 아마..... 로 빠지면서 새로움을 일궈낸 대상에 찬미를 보내는 사람 등등... 윤치호는 맨 마지막 부류였다.
그의 일생은 매우 복잡하고 오묘하며 애매하고 모호하다. 전라도 말로 참 거시기하다. 물론 무 베듯 잘라 얘기하자면 그는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원로격 친일파였다. 세계를 알아가던 시절, 그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이건 윤치호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당시 개화를 주창한 이들 대부분은 “우리도 일본처럼”을 모토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갑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민영익 등에게 칼을 휘두른 이후 개화파가 달려갔던 것은 국왕이 있는 경복궁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이지 않았겠는가.
젊은 날의 윤치호의 눈에 자신의 고국은 정녕으로 한심하고 아둔한 나라였다. 왕비 척족들이 온 나라를 거덜내고 사또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제 배 챙기기 바쁘고 지식인이란 것들은 아직도 서양 오랑캐 타령하고 앉았고......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도망가고 이후 미국까지 건너가 넓은 세상을 본 윤치호에게는 더욱 그랬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라고 나이 스물 다섯의 청년은 땅을 쳤고 스물 일곱 되던 해의 봄에는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라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조선에서 흔치 않은 국제적 경험자이자 열등감의 덩어리였던 그는 귀국 후 열정적인 개화 운동에 나선다. 독립신문의 주필,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등을 도맡으며 국민들에게 요즘의 구호를 조금 컨닝하여 말하면 “미래는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그 내부 안에서 탁구대 하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핑퐁핑퐁 그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분노하면서도 “흑인들을 데리고 와서 영어 가르쳐 줬으면 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중성, 자신의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젊은이들에게 대한의 영광을 얘기하고 ‘애국가’ 가사를 지으면서도 툭하면 자신의 나라와 백성에 저주에 가까운 한탄을 내뱉는 양가감정,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러일전쟁은 동양인의 승리라고 찬미하는 어수선함,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을사조약의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그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행동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 미적거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를 노래하며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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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2월 11일 신돌석의 마지막 날
날이 찹니다. 삼한사온이라는 미덕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 겨울은 초입부터 예의가 없네요. 곳곳에 보일러 망가지고 가다가 미끄러지고 동장군한테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별 탈이 없으신지 모르겠네요. 서울보다 좀 추운 곳이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바람 피할 집에 들어와 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등 지지면 사람의 몸은 노골노골 녹아들면서 깊은 잠에 빠지게 마련이죠.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인가요. 거기서 맥베드가 왕을 죽인 뒤에 환청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이 이런 거였죠. “맥베드는 잠을 죽였다. 맥베드는 다시는 편히 잠들 수 없으리라.” 너무나도 평화롭게 맘 푹 놓고 잠자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왕을 죽인 죄책감의 소산이었겠죠. 1908년 12월 11일 대게 많이 나는 영덕 땅의 한 집에서 한 걸출한 인물이 비슷하게 그 안온한 잠을 끝맺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신돌석이라는 사람이지요. 그는 대대로 영해 고을의 아전 노릇을 하던 집에 태어났습니다. 장가를 든 다음 갓을 썼다가 양반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대충 그 집안을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영해라는 고을에 주목해 보면, 조선 말기 그야말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민란을 주도했던 이필제 (이 사람도 영화 주인공으로 적격인데)라는 사람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 돌석은 그의 아호 같은 거였고 태호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그가 의병 항쟁을 벌이면서 쌓아간 전설 속에서 우리는 신태호 아닌 신돌석을 기억하게 됩니다. 꽤 교육도 받은 것 같고 한시도 지을 만큼 소양도 있었어요. 그의 한시 하나를 들어 볼까요.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땅에 누운 나무에 가로막힌 단군의 터전을 한하노라
스물일곱 남아가 이룬 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이는구나.
허동현 교수는 ‘단군의 터전’이라는 점을 들면서 그가 단순한 충군의식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즉 봉건적 충성보다는 민족적인 울분과 반외세 의식이 앞섰다는 뜻이겠죠. 사실 그게 대세여야 했을 겁니다. 갑오년의 그 수십만 농민 항쟁도 결국 봉건 통치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표하지 못했던 나라, 전국의 의병들을 기껏 모아 놨더니 의병 총대장이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총대장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나라에서 사실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결국은 허당에 질곡 이상의 존재일 수 있었겠어요. 거기다가 신돌석은 사정상 합류를 못했다지만 홍범도같은 평민 의병장은 제대로 끼워 주지도 않았고 상놈 선봉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 버리는 일이 횡행하는 판이었으니 신돌석은 잔뜩 변죽만 올리고 만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울진 영덕 삼척 양양 등 오늘날 7호선 국도변의 고을들, 은 그의 주무대였지요. 울진 영덕에 뭐 볼 게 있었나 하지만 이쪽 고을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고 하네요. 그때 일본인들이 대게 맛을 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돌석이 경북 영양을 점령한 뒤 태백산맥을 넘어 울진으로 쳐들어가자 일본인들이 대거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도 일본인들의 동해안 진출은 꽤 활발했던 것 같아요.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온 가족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고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휘하의 의병에 참여해요. 의병 소리를 듣고 이를 말리러 온 영해 군수 경광국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해요. “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말리러 온 것 뿐이다. 눈빛은 횃불같고 다리는 바다를 건널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 실제로 일본군도 “그 어깨 힘이 대단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정말로 용력이 대단했던가봐요. 다른 의병부대가 괴멸되어 가는 동안에도 신돌석의 의병대는 재빠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 지속적인 타격을 줍니다. 군대 해산 전의 대한제국 진위대도 신돌석을 잡으려들지만 쉽지 않았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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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12.12의 비극
역대 대통령 이름을 적을 때 저는 대개 뒤에 대통령을 붙여 줍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독재자이긴 했으나 어쨌건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됐거나 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저는 대통령 호칭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태우도 광주학살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직선 대통령이고 그 뒷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하지만 딱 한 사람 전두환만큼은 저는 대통령 호칭을 여간해서 붙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대한민국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고 휴전선 이남의 공화국 영토를 제 식솔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던 광주의 흡혈귀이자 그 이후 펼쳐진 80년대 불바다의 발화자(發火者)에게 공화국 대통령의 칭호는 아무리 양보해도 돼지 앞의 진주고 개발의 편자기 때문입니다.
시바스 리걸과 여가수와 여대생을 앞에 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가 박살난 후 발생한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대한민국 군 장성들은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현확 부총리가 헌법에 의해 규정된 통치권자 승계 원칙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자리에 배석해 있던 수십 명의 군 장성들은 벌떡 일어나 최규하 국무총리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비록 독재자의 수족 노릇을 충실히 하던 군인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사병이 아닌 공화국의 군인임을 증명했던 거겠죠.
하지만 원래 어느 역사에서든 아름다운 순간은 길지 않은 법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도 되지 않아 12.12라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군사 반란이 일어나니까요. 전두환 이하 육사 11기들과 그 똘마니들이 ‘거사’에 성공한 후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하는 모습이 자료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름 목숨을 건 일이 끝나서 그런지 노는 꼬라지들을 보면 마치 시험 끝낸 어린아이들 같더군요. 스스로 위계질서를 뒤엎고 군령을 거역한 이 깡패 군인들은 그렇게 즐거워했지만 그 순간 온몸의 조각조각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려는 하나회 인맥에 맞서서 대한민국 국군 통수 체제를 지키려던 두 장군.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뒷 이야기는 무슨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 합니다. 우선 장태완 소장부터 볼까요.
드라마 속에서 카리스마 성우 출신 김기현씨의 열연으로 유명한 바로 그 멘트 “ 이 반란군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전차 몰고 가서 너희들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라고 일갈하던 호랑이같은 장군이었지만, 이미 그 호랑이의 네 다리는 하나회 출신 늑대들이 다 물어뜯어 놓은 뒤였지요. 장태완 장군이 체포된 후 장군의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합니다. “모반자가 득세한 세상에 충신이 살아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넉 달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그 횡액을 당한 후 80년에 고3이었습니다. 보안대원이 집안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서울대 자연대 수석입학을 해 유폐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기쁘게 했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비극과 전두환 시대의 암울함에 고민하던 아들은 홀연 집을 나갔다가 할아버지의 묘소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장태완 장군은 평생 동안 “반란을 막지 못하고 가족 3대를 망친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살았고 2010년 한많은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써 끝난 게 아니었지요. 올해 1월 17일 장태완 장군의 부인이 투신자살로 생을 끝맺은 겁니다. 남편이 먼저 간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지요. 그 슬픈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1월 18일은 전두환의 여든 한 번째 생일이었고 29만원 전재산의 노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답니다. 참 얄궂어도 이렇게 얄궂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휘하 여단장들이 죄다 신군부에 가담한 것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공수여단을 출동시키며 반란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천상 군인이었지요. 6.25 참전 장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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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8일 간절했던 밤 뜨거웠던 밤
12월 18일 선거 전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노무현 후보의 마지막 명동 유세. 겨울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를 향해 환호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노사모를 비롯한 노무현의 열혈 지지자도 있었지만 단일화를 위한 여론 조사 끝에 노무현에게 패배한 이래 노무현을 도와 온 정몽준의 지지자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차기 대통령 정몽준의 피켓을 들고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 정몽준 대통령을 외쳤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엄청난 꽹과리 소리가 되어 그들을 덮쳤다. “속도위반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대찬 여성 추미애 의원도 있고 국민 경선을 끝까지 함께 지켜온 정동영 의원도 있습니다.!”
이 말에 정몽준 의원의 얼굴은 냉동인간으로 변해 버렸다. 새 정권의 주인은 못돼도 2대 주주는 족히 될 것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만큼은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던 이 재벌집 도련님은 즉시 식솔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우래옥 냉면집에 가서 회합을 가진 뒤 10시 반 ‘노무현 지지 철회’를 발표한다. 우래옥발 태풍은 전국을 덮친다. 가장 신명나서 말춤을 춘 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만들어 뿌렸다. 그 호외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 제목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글자 한 자 한 자에 배어 있던 비아냥과 조소의 냄새는 지금 떠올려도 비릿하고 퀘퀘하다.
그날 나는 선거 다음 날 휴가를 낸 터였다. 투표를 끝내고 스키장으로 가 아들내미 스키를 가르칠 계획이었기에 장거리 운전을 하려면 잠을 자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몽준이 왜 삐졌는지 노무현이 정몽준 집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까맣게 모른 채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밤 11시 30분. 짜증이 확 일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웬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목소리로 대충 신원 파악을 하고 뭘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뒤 계속 울었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잠이나 자. 진인사대천명이지. 잘 된 걸 수도 있어. 대충 진압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그날 나는 전화 열 통을 받았고 수십 통의 문자를 받았다.
“정몽준 개새끼는 끝내 개새끼다.” “민주노동당원! 내일만은 2번 찍어 줘.” “목숨 걸고 투표! 그래도 이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너무 원통하다. ” 그 가운데 압권은 잠이 깬 나머지 접속하여 발견한 선배의 이메일이었다. 제목은 “나를 아는 모든 분들게.”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자신의 주소록을 총동원하고 명함첩까지 가져다 놓고 일일이 기입하여 보낸 수백 통의 메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 메일에는 동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2000년 총선 당시 부산 북구에서 청중 하나 없는 유세장에서 눈물겹게 연설하던 노무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선배의 메일에는 이런 짤막한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동영상을 보아 주십시오. 이 사람을 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저 용기와 희망을 잊어버리고 살되 잃어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아 주십시오."
나는 그 이후 그 선배를 개인적으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날 그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 메일 주소 오타 날까봐 또박또박 타이핑하면서 울었을 것이다. 이렇게는 안된다. 이렇게는 안된다. 나에게 전화하고 다른 이를 깨우고 문자를 날리고 조선일보 호외 보며 발 동동 구르던 이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뭉쳐진 뜨거움이었다.
그것들이 노무현을 위한 것이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산하의 오역
ㄴ1843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 캐롤 출간
찰스 디킨스는 영국이 바야흐로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19세기에 유성우처럼 출현했던 작가군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중의 하나입니다. 디킨스라고 하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올리버 트위스트’ 하면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마련이죠. 소설은 좀 가물거리더라도 캐롤 리드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올리버!”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죠. 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양산되었지만 그늘 속에 방치되었던 어두운 풍경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수프를 더 달라고 했다가 혼찌검이 나는 구빈원 (고아 수용소같은)이나 퀴퀴하기 이를데없는 런던의 빈민가와 잔인한 범죄의 소굴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불쌍한 소년의 모습은 사실 디킨스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디킨스의 어린 시절 그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간 적이 있었고 12살의 디킨스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이상 구두약 공장에서 얼굴이 누렇게 뜰 때까지 일해야 했으니까요. 그런 생생한 체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굵직하게 틀어박혀 있습니다. 이 디킨스가 남긴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하나가 1843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출간됩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었죠.
천하의 구두쇠에다가 돈이 아까와 난로도 때우지 않고 일하면서 직원을 들들 볶는 스크루지 영감에게 그와 비슷한 성격이었던 동업자 말레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세 유령이 방문할 것임을 알려 주죠. 그 유령은 스크루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 줍니다. 스크루지는 자신의 과거를 여행하면서 아름답고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과 자신이 구박해 마지않던 조카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엿보면서 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쳐지는지를 확인하며 아연실색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한 소년의 예정된 죽음을 듣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유령은 쾌활하면서 달변이었던 이전의 유령들과는 달리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과묵한 유령이었고 그는 스크루지를 그의 묘지 앞으로 안내합니다. 그 묘지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한평생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구두쇠 스크루지가 여기에 잠들다.” 스크루지는 이에 울며불며 유령에게 매달리다가 잠을 깹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하죠.
저도 가물가물해서 기억을 더듬어 봤습니다. 그런데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이렇게 한 구두쇠의 변신 스토리만 있는 건 아니에요. 군데 군데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이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두 번째 유령, 즉 현재를 보여 주던 유령이 스크루지와 헤어질 무렵, 그는 품 안에서 두 아이를 풀어 놓습니다. 사내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 둘은 엄청나게 악을 쓰고 떼를 쓰면서 다시 유령에게 달라붙으려고 발버둥치는데 그 몰골이 워낙 흉악하여 스크루지는 그들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유령은 이렇게 답합니다.
““사내아이는 ‘무지’ 계집 아이는 ‘빈곤’이라고 한다네. 이 두 아이를 조심해야 돼. 그런데 위험한 건 사내아이 ‘무지’다. 무지 다음에 오는 것은 멸망이거든 ” 유령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두 존재로 무지와 가난을 설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무지를 더 치명적인 존재로 꼽지요. 딴은 그렇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할 것이라지만 ‘잘 살아 보세’ 하는 노력과 ‘안되면 되게 하라’는 깡다구로 극복되기도 할 거고, 실제 그런 사례는 많이 발생했지요. 하지만 무지는 다릅니다. 단순한 지식의 부재만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음, 알고 싶어 하지 않음, 알아도 모르는 체 등 당면한 현실과 깨쳐야 할 지혜에 대한 외면의 총합인 무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는 디킨스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일 테니까요. 2007년 12월 19일 ‘부자 되세요’를 내세운 이를 뽑았던 한국인들이 그 재앙을 경험한 이후 2012년 12월 19일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세’의 신화를 부르짖는 이에게 자신들을 맡긴 것 역시 그렇지
몇 년 전 이맘때, 저는 삼각지 대로변의 한 수제 과자점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우유와 밀가루, 계란 등등 재료의 황금 비율은 물론, 굽는 시간과 꺼내는 타이밍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과자의 까탈스러움을 견디면서 주인 김용안씨는 30년 세월을 흘러 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물을 들고,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또는 시내로 종종걸음을 쳤습니다. 김용안씨는 옛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합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포장 과자들이 쏟아지기 전, 생과자는 단맛에 굶주린 아이들의 침을 마르게 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만 통행금지가 해제되던 시절,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밤새 과자를 기다렸다지요. 그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그런 분들이 드문드문 계셨습니다. 아기를 들처업고 온 서른 중반의 아주머니도 그 중의 하나였지요.
누구에게 줄거냐는 물음에 "엄마 주려구요."라고 대답을 하기에 저는 옳다구나 하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만 그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아니 어머니 선물하는데 그 말이 뭐가 어렵냐고 사정해 봤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카메라를 내리는데 그 아주머니가 미안한 듯 말을 건네 옵니다.
"사실 저희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구요, 원래는 이모예요. 친엄마 아빠는 어려서 사고로 두 분이 함께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쪽 친척도 없고 엄마 쪽도 우리 이모 뿐이었죠. 이모가 자기랑 함께 살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모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죠."
이모네도 그렇게 형편이 넉넉지는 않았답니다. 이모는 시댁 식구들한테나 조카들한테나 죄인 아닌 죄인으로 평생을 지내셨다지요. 조카들에게 옷 한 벌 사주기도 맛난 것 먹이기도 껄끄러웠고, 가엾은 조카들이 기 눌리고 사는 모습도 안스러웠고......
"크리스마스 이브만 되면 엄마가 몰래 이 과자 한 봉지씩 쥐어 주시면서 (누가 볼지 모르니) 다 먹고 와라, 다 먹고 들어와라 그랬어요. 우린 생일날 미역국도 못먹었어요. 생일 선물도 꿈도 못꿔 봤고. 1년에 딱 하루, 크리스마스 선물이 이 집 과자였지요."
조카들의 생일날 미역국을 끓이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던 이모 아니 엄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라도 조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형이나 옷 같은 건 시댁 식구들의 눈총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먹어 치워 없앨 수 있 없는’ 과자였다지요. 또 크리스마스 이브만큼은 꿀짱구나 자야같은 싸구려 과자 아닌 쌈박한 선물을 마련하고 싶었던 이모 겸 엄마는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당시로선 유명하던 삼각지 과자점의 손님이 되었던 겁니다.
아기 엄마가 또 다른 산타클로스가 되어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떠나간 뒤, 김용안씨는 다시금 손아귀에 힘을 주어 낡은 기계를 돌리기 시작했고, 과자 굽는 냄새가 캐롤처럼 은은하게 가게 안을 적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던 크리스마스 이브날, 오래도록 버텨온 한 과자집에서는 누군가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을, 그리고 될 과자들이 평화롭게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이 잠시 불통이 될만큼 순간 통신이동량이 많다는, 잊고 살던 사람들의 번호가 성탄 메시지와 함께 찍혀 일순 당황할 때가 많은 크리스마스...... 추석같은 명절날이 잃어버린, 또는 잊고 살던 ‘고향’을 상기시켜 준다면 크리스마스는 잃어버린 또는 잊고 살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선물을 사고 카드를 보내고 하다못해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는 날이 된 것 같습니다.
원래 저는 이런 거 안주고 안받기 운동을 저 혼자 펼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만, 삼각지 과자점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다음의 질문이 삐져 나와 머릿 속이 뿌옇게 됩니다. 어제 서울을 덮었던 뿌연 안개처럼 말입니다. 그 질문이란...... “내가 받아 본 선물 중에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값진 선물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뿌옇게 되지 마시고, 안개 속의 가로등처럼 반짝반짝
12.30 산하의 오역은 작년 것을 옮겨 옵니다. 그리고 설정도 일반친구 설정으로 바꿔서 올립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고 한 그의 유언이 실현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의 1주기를 생각하면서
산하의 오역
1896.12.30 호세 리잘의 마지막 노래
1896년 12월 30일 일단의 소총 부대 앞에 한 작달막한 남자가 섰다. 몇 분 뒤면 총살을 당할 운명의 그는 죄수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죄수가 아니며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니 정장을 입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아울러 총을 치켜드는 군인들 앞에서 그는 돌아서서 등을 보인다. 총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앞을 보고 서면 죽으면서 당신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느니 내 조국 품에 안겨 죽는 것이 낫다." 뒤돌아선 그의 등에 총알이 퍼부어지고 남자는 쓰러져 숨을 거둔다. 필리핀의 국가적 영웅 호세 리잘의 최후였다.
호세 리잘은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학업을 종결했다. 11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천재였으며, 다작의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 철학, 경제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팔방미인에 '완소남'이었다. 외모까지도 귀골이 철철 흐르는 미남이다. 스페인 식민통치하에서도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기억,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당했던 인종차별, 그리고 필리핀 땅에서 자신의 매형들을 포함한 필리핀인들의 토지를 거침없이 강탈하는 스페인인들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유학 시절 탈고하여 스페인에서조차 큰 화제가 된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소설은 필리핀인들에게 널리 읽혔고 스페인 식민 당국은 노발대발하여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친지들은 귀국을 만류했지만 그는 필리핀에 돌아왔다. '독일 의사'로 불리며 동포들에게 의술을 펼치던 그는 농부들의 소작료 인상 반대 시위를 조직하면서 또 한 번 당국의 눈에 가시가 됐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필리핀을 떠나 홍콩에서 의사로 명성을 날리며 돈도 벌었지만 그는 끝내 필리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쟁터는 바로 필리핀이다 ."
스페인 당국은 귀국한 리잘을 가만 놔 두지 않았다. 리잘이 그 친구들과 <라 리가 필리피나>라는 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이 단체를 통한 필리핀 인들의 단결을 천명한 뒤 그는 바로 체포되어 다피탄이라는 시골로 유배된다.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리잘은 자신의 돈을 들여 마을에 전기를 놓았고 직접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큰 공사(?) 중 하나는 폭포가 딸린 수영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했다. 리잘은 마을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했으며 그 돈으로 인해 마을에는 마침내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의사였다. 그는 유럽에서 그 심한 차별을 겪으며 배운 의술을 자신보다 더 심하게 차별받고 경멸받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심성 고운 의사였고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었다. 그는 때로 총독에게 자신의 자유를 청원하기도 했고 해외에 나가겠노라 요청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에 가담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 민중을 사랑했고 뻔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억지로 돌아왔으며 남국의 태양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리는 필리핀 아이들을 사랑했고, 스페인 당국의 수탈에 허덕이는 필리핀 인민들을 부둥켜 일으켰다. 그것은 죽을 죄목이었다.
1896년 호세 리잘의 유배형 소식에 분노했던 필리핀 청년 중의 하나로서 리살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안드레스 보니파쇼가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스페인 당국은 당장 이 봉기의 배후로 리잘을 지목했고 리살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끝내 1896년 12월 30일 총살대 앞에 서게 된다.
죽어가기 전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필리핀인들에 의해 애송되는 일종의 국민시(詩)다. '마지막 인사'라는 이 시의 처음과 끝연만 골라 읽어 본다.
"잘 있거라,
산하의 오역
1978년 1월 14일 기구한 최은희
영화 <괴물> 기억나시죠? 한강에서 괴물이 별안간 나타나 시민들을 쓸어 버리는 장면에서 우리의 봉테일 감독은 이 영화가 반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듯 한 용감한 미군 병사를 등장시킵니다. 송강호와 함께 괴물과 맞섰던 유일한 사람이죠. 그때 괴물에 덤비려는 미군 병사에게 매달리며 말리는 애인이 나오는데 그 애인 역을 맡은 여배우는 꽤 유명한 사람의 딸입니다. 바로 신상옥 감독의 딸 신승리지요.
신승리씨는 전혀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 탄생으로 말미암아 한국 영화사상 최고로 명망이 드높다 할 스타 부부의 파탄을 가져온 이이기도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여배우 최은희와 결혼했으면서 여배우 오수미와 몰래 사랑을 키웠고 아들을 얻지요. 여기까지는 최은희도 아이 못 가지는 죄도 죄려니 하고 용서를 하려 했는데 두 번째 애가 태어나면서는 그만 인내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둘째가 신승리였다죠.
최은희씨는 아시다시피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입니다. <상록수>의 채영신, <춘향전>의 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의 별당아씨 등 한국 여성의 대표적 캐릭터 가운데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고 본인도 기억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영화의 히로인으로 한국 영화를 빛냈죠. 저는 EBS에서 가끔 해주는 한국 영화 걸작선에서 최은희씨를 만나 본 적 있는데 요즘 기준으로 빼어난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그 둥근 얼굴과 야무진 이목구비에서 배어나오는 신비한 매력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철모르는 옥희 앞에서 속내를 숨기려고 애쓰던 <사랑방 손님의 어머니>에서는 더욱요. 한국적 여인상이라는 말에 한(恨)이 많이 배어나 있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과부 배역을 많이 맡았던 여배우라고 합니다.
그녀는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한 뒤 이미 한반도 전체에서 유명해집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말이죠. 47년이면 38선을 넘나들며 장사하던 사람들도 많을 때였죠. 하지만 그 유명세가 결국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녀는 목포에서 영화 촬영 중이었다고 합니다.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 와중에 그녀는 서울에 있던 카메라 촬영기사 남편을 찾아 남들이 피난 가던 길을 거슬러 올라 27일 서울로 올라옵니다. 서울 함락이 28일이었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어도 머리 깎고 들이민 셈이죠.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결핵에 걸린 남편을 부양하며 죽은 듯 숨어 지내던 7월의 어느 날 남산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한 인민군 장교에게 뒷덜미가 잡힙니다. “동무 최은희 동무 아니오. 나 심영이오.” 일제 때 유명했던 배우로서 월북했다는 소문이 났던 심영이 최은희를 알아본 겁니다. 최은희는 졸지에 인민군 내무성 소속 경비대 협주단의 단원이 됩니다. 쉽게 말해 문화선전대가 된 거죠. 배우 김승호, 엄앵란씨 삼촌 엄토미, 성악가 오현명 등이 끌려와 있었다죠. 이들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북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다가 폭격 와중에 기회를 포착해서 최은희는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감행합니다.
도망하다가 그녀는 북진하던 국군 6사단과 마주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를 불렀다.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지요. 그런데 6사단 정훈 장교는 그녀에게 선무 공작을 요구합니다. 즉 국군의 문화선전대 노릇을 하라는 거였지요. 며칠 상간으로 그는 정반대의 공연을 하며 다른 편의 군인들을 위무해야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부역자 딱지가 위태롭게 등짝에 붙어 있었던 이유도 있었죠.
어느 날 헌병대에서 그녀의 부역 혐의를 조사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고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녀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헌병대원은 잔뜩 겁먹은 나를 한적한 민가로 데려갔다. 술상 앞에 헌병대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피부도 곱구먼"이라며 다가왔다. 그를 확 밀어젖혔다. 하지만 그는 씩씩거리며 권총을 겨누더니, 내 몸 위로
산하의 오역
1981년 1월 24일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남다
남북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손으로 꼽는다고 한다. 일단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기본으로 하고 “아리랑” 정도는 함께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 레파토리는 뚝 끊길 것이다. 북한에서 한국 방송 좀 본 사람들은 남한 대중 가요를 흉내낼 수도 있겠고 일부 남한 사람들도 ‘휘파람’이나 ‘반갑습니다’ 정도는 어설프게 부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예는 못된다. 그런데 남북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하나 더 있다. ‘ 고향의 봄’이다. 이미 해방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의 입에 들러붙었던 이 노래의 작사자는 이원수다. 그리고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무려 열 다섯 살 때였다. 소파 방정환이 운영하던 잡지 <어린이> 동요 가사 부문에 응모했는데 거기에 덜컥 당선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의 회고다. 이 노래 가사가 태어난 배경은 진달래꽃 예쁘기로 이름난 창원 천주산이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으로 고향을 떠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 ‘고향’은 전국 방방곡곡에 다 있었고 ‘고향의 봄’은 그들 모두의 울음보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여기에 홍난파가 붙인 처연한 가락까지 곁들여졌을 때 그 노래를 끝까지 제대로 부를 수 있었던 조선인과 한국인은 드물었을 것이다.
15세에 이런 노래를 지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에게는 더 신기한 선배(?) 하나가 있었다. 그건 이원수보다 1년 앞서서 <어린이> 잡지에 동시 부문에서 떡하니 입선작을 낸 최순애였는데 입선 당시 최순애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오빠 생각’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1920년대는 흡사 1980년대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3.1항쟁으로 폭발한 민족적 열기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고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황해 바다를 넘어 침략자에 저항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몸을 던졌다. 유독 슬픈 이별이 많았던 시대, 아직 칭얼대며 조르는 동생에게 어느 오빠는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오마.”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설랑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을 떠났던 풍경 그대로가 이 ‘오빠 생각’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기럭기럭 기러기는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는 슬피 울건만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오지 못하는 혈육을 둔 사람 조선 팔도에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열 여섯 이원수는 열 둘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 잡지에 등단한 인연으로 그들은 펜팔 친구가 됐고 꾸준히 편지가 오가며 그 속에서는 연정이 싹텄다. 그리고 둘은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청하고 그를 응낙한다. 원조 접속 커플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둘이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 날, 이원수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최순애가 기다리는 수원으로 향했다. 무슨 색 옷을 입고 갈 것이라는 007 미팅 식의 약속까지 철석같이 한 상황. 그런데 목을 학처럼 늘이고 기다리던 최순애 앞에 이원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제 시간 열차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최순애는 플랫폼을 떠나지 못했다. 아 이 원수같은 원수. 그러나 그녀에게 날아든 것은 또 하나의 청천벽력이었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원수는 그로부터 거의 1년간 옥에 갇히게 되는데 최순애의 집에서는 ‘빵잽이’ 사위를 달가와하지 않았고 최순애에게 다른 혼처를 제시하지만 최순애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출감 후 이원수는 최순애의 집에서 몸을 회복했고 이윽고 결혼식을 올린다. 이원수는 ‘오빠’가 되었고 최순애는 이원수 평생의 ‘봄
수양이 덜 된 보통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두들겨 패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마는 그 중의 한 사람은 교사였다. 교실에서 떠들었다는 이유로 친구 둘을 불러 세워 넣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던. 아이들이 툭툭 뺨을 건드리는 척하자 여지없이 튀어나와서 이 새끼들아 이렇게 때리라고! 하며 뺨을 후려 갈기고 아이들의 서로 뺨때리기가 점점 강도가 더해지는 것을 엄숙하게 지켜보던. 그리고는 “정신 좀 차려라 이것들아.”라고 뇌까리던.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하여간 어린 마음이었지만 공포보다는 증오가 머리를 채웠던 기억이 난다. "씨바 저기 선생이가.” (슬프게도 우리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썼다.)
그 교사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일벌백계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공동책임(?)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율적 처벌’의 한 형태로 그 기막힌 볼거리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서로 때리고 맞는 매로 그 어린 뺨들이 발개지고, 매 맞는 고통과 치밀어 오르는 부아로 이마까지 시뻘개지고 나중에는 서로에 대한 엉뚱한 오기까지 발휘하여 서로를 때리기까지 그 선생이라는 직함의 호로자식은 마치 정의를 집행하는 판관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그 선생도 아이들이 느껴야 했을 고통과 상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소싯적에 그런 일을 당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 그는 그 고통에 둔감했고 처벌과 징계를 내리는 절대권자로서 아이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어린 마음에서건 지금의 중년의 마음으로서건 그 교사는 용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존엄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실격이었고 좁혀서 한 어른으로 보아도 함량 미달의 인간이었다.
서초구청에서 주차 관리 일을 보던 청원경찰 한 명이 별안간 돌아갔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심장마비일 수도 있고 그의 팔자가 그게 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의 판단보다도 역학적인 결론보다도 나는 그가 죽음을 맞지 전 치러야 했던 횡액에 대해 몸서리치는 분노를 퍼붓게 된다.
그는 근무 중 지고하신 서초구청장님께서 탑승하신 차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 안내를 소홀히 한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 이런 일은 구청장님보다는 그 아래 사람들이 더 열을 내게 마련이다. 사장님을 보고도 딴짓하느라 인사를 안 하는 후배에게 “임마 눈 똑바로 보고 다녀.”라고 힐난을 했듯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도의 호통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려면 때려 치워!”까지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조직의 수장이고, 그 조직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위인의 행차가 담당 직원의 착오로 지연되거나 방해받았다면.
그런데 서초구청에서 이 불운한 주차 관리 청원 경찰들에게 내린 징계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 “삶의 질 세계 1등 도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서초구의 고위 공무원은 청원경찰들이 혹한 속에서 언 손을 비비고 딱딱해진 발을 녹일 수 있는 초소의 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했다. 물론 “정신 차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흐트러진 ‘책임감’을 다잡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내 이런 추위가 없었다는 1월 초의 청룡언월도 같은 겨울 바람 속에 사람을 내동댕이친 것은 훈계가 아니라 고문이었고 편달이 아니라 폭행이었다.
나이 마흔 여덟의 중년이 그 칼바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껑충껑충 뛰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황량한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을 풍경을 상상해 보라. 히터로 데워진 차에서 내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청사로 종종걸음치는 가운데 “허허 겨울은 추워야지”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차라리 무슨 차든 들어와라. 그냥 서 있기는 힘들다.’ 손을 사타구니에 넣고 이를 악물면서, 개도 개집이 있는데 사람이 들어갈 초소에 굳건히 채워진 자물쇠를 보면서 그들은 대체 무슨 심경이었을까. 나 같으면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니라 속이 터져서 죽었을 것 같다. 속이 타서 화상으로 죽었을 것 같다. 속이 뒤집혀 내장파열로 죽었을 것 같다.
청원경찰의 죽음이 그 얼차
산하의 오역
1987년 1월 27일 장공 김재준 역사 속으로
형편없는 날나리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이랍시고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야 예장은 뭐고 기장은 뭐고 합동은 뭐고 통합은 뭐냐 고신은 또 뭣하는 거냐.” 즉 개신교 내부의 교파들의 차이를 묻는 것일 게다. 사실 교리 차이는 없다. 오히려 역사의 문제고 실천의 차이가 있을 뿐. 조선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의 땅 조선에 몰려들면서 ‘나와바리’가 겹치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네비우스라는 선교사가 조선 땅을 나눠서 선교하자는 제안을 한다. 호남, 충청은 미국남장로교, 호주 장로교는 경남,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회, 평안 황해 경북은 미국 북장로교가 맡기로 한 것이다. 떡 받아먹을 사람 의견보다는 떡 줄 사람들이 알아서 정한 이 ‘분할’은 현대 기독교의 역사를 형성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은 지금 ‘고신’ (고려신학)이라 불리우는 이들인데, 이들은 호주 장로교 선교 지역인 경남을 중심으로 했고 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버젓이 했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 교단에 반기를 들고 갈라져 나와 ‘고신’을 표방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의 중심은 평안 황해 일원이었고 이들은 매우 보수적인 교리를 고수하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어느 목사가 “교회에서 여자가 조용히 해야 하고 여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2천년 전의 일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이 진리는 아니다.”라고 설교했다가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제소된 이들을 혼찌검을 내고 그 주장을 철회토록 할 정도였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평사리 중)
그런데 캐나다 본국의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구역이었던 함경도에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닌 선교사들이 꽤 활약했고 이들은 간도 지역까지 발을 넓히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도 결합했다. 용정에서 자란 문익환과 윤동주의 신앙의 결은 그래서 “믿슙니다”와 다르고, 1901년 함경북도 최북단 경흥에서 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은 향용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신교의 주류와는 남한강과 북한강처럼 갈라진 것이다.
1947년 장로교 내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교장 김재준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성서무오설을 비판하여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김재준 교장이 주장한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다닥 집어 넣어서 그대부터 그 사람은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로 삼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던 바와 같이 조선신학생들 일부는 격렬히 반발했고 또 역시 앞서의 종교 재판 (여자는 잠잠하라 사건) 때 재판장 노릇을 했던 평안도 출신 목사 박형룡은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인가하여 사실상 조선신학교의 존재를 부정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분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해괴한 말을 하기도 하는데)
전쟁 중에 다시 통합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지만 교수진은 보수색 일색. 분란이 그치지 않은 끝에 한국 예수교 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이단’으로 선고한다. 여기서 갈라져나 온 것이 ‘기장’ 즉 기독교 장로회다. 김재준은 그 교파의 시조(?)가 된다. 교세로 따지면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발끝도 못 따라가지만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라면 최소한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무당같은 주문을 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예수교 장로회 내 ‘합동’은 뭐고 ‘통합’은 뭐냐. 나중으로 미루자.
김재준은 ‘꼴통 기독교’, 즉 인간을 하느님의 부속품 취급하고,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절대적인 진리이며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행태를 이단시했던 강퍅한 기독교를 벗어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막막한 공간을 유영하며 인간의 역사(歷史)를 통해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따랐던 사람이었다. 그는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등 “불의에 가득 찬 시대에 있어 예언자의 용기”를 강조했으며 “어쨌든
70억 명 4㎏씩 나눌 금이 심해에 … 각국 ‘신 골드 러시’
-바닷속 자원전쟁 가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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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951/10626951.html?ctg=1100&cloc=joongang
산하의 오역
1996년 2월 5일 어느 추락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오늘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시신 투쟁’ ‘시신 시위’라는 단어가 눈을 찌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동료들이 그 시신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비윤리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는 말일 게다. 그 단어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나 역시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의 관이 전선의 일부가 되는 풍경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다. 비록 고인의 열망이 어떠하였고 그 뜻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처음으로 만났던 ‘열사’ 조성만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그래도 숱한 장례식에 참석했고 노래 부르고 누구 누구 살려내라고 부르짖기도 했던 내가 이런데 중앙일보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장례 투쟁’을 조직하고 시신이 전선의 한가운데 놓이게 만든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정권과 기업에 있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목을 매달아 죽여 버린 인혁당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해 불태워 버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시국과 관련한 죽음 앞에서 힘 가진 이들이 즐겨 기도했던 것은 그 시신의 신속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이 집중했야 했던 것은 일단 시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왜 피가 돌고 살이 뜨거웠던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썩어 진물이 나는 시신으로 변했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이었다.
1996년 2월 5일도 그랬다. 아파트 촌이 되어 버리기 이전의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4리 수지2구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일산과 분당으로 봉화를 올린 경기도 신도시 건설붐은 용인 수지 지역에도 밀어닥쳤고 자기 땅은 아니나마 그곳에 터 잡고 살던 이들은 오갈데없는 처지에 놓였고 밀어닥치는 철거반에 맞서 망루를 쌓아 올렸다. 용산참사 때 봤던 그 망루와 비슷한. 2월 5일 동절기 철거는 없다던 약속을 깨고 공권력과 용역 깡패들이 몰려들었다. 경황 중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두들겨 맞을 사람은 두들겨 맞고 몇 명의 마을 주민과 학생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그런데 망루의 1층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쪽의 증언으로는 용역들이 ‘방화’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믿고 싶지 않다. 어쨌든 불은 망루를 휘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사람 살려 하는 공포스런 비명이 망루 위에서 터져나왔지만 깡패들과 전경들은 망루 아래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해머와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들을 휘두르며 불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의 집을 두들겨 부쉈다. 불길은 계속 치솟았고 LP가스통을 건드렸다. 불길은 더욱 힘을 얻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들의 멱살을 잡을 듯 날름거렸고 열기와 유독가스는 몇 평 안 되는 망루의 가엾은 농성자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래도 불을 끄려는 노력은 없었고 철거는 계속됐다. 멀쩡한 사람들이 타 죽을 지경인데도. 그 흔한 매트리스 하나 깔리지 않았고 소방차도 오지 않았다.
지옥의 악마들이 혀를 찰 현실의 지옥불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결심을 한듯 망루 담을 넘어섰다. 그리고 18미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명과 툭 툭 둔탁한 소음. 검은 꽃잎들이 계속해서 땅으로 추락했다. 그 가운데 세 아이의 어머니 신연숙도 있었다. 허리가 나가고 머리가 깨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현장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펼쳐졌다. 무려 20여분 동안 용역 깡패들은 이들을 방치했고 대한민국 공권력은 사람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이웃들을 막아선 것이다. 설마 떨어지랴 싶어 당황을 했던 건지 임무를 완수한 건지 그들은 부리나케 철수해 버렸다. 한참 뒤에야 병원에 옮겨진 사람들 가운데 신연숙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법에도 규정된 가이주단지 이전, 영구임대 주택 제공 등을 외치며 세 아이와 내 남편 발 뻗을 자리는 달라던 한 주부는 1996년 2월 5일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는 높이의 5층 망루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안치된 동수원 병원 영안실에는 또 ‘사수대’가 꾸려졌다. 또 언제 경찰과 깡패들이 들이닥쳐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식재료값 때문에 한숨이 늘어가는 지금!
식비를 줄이면서 깨끗한 식재료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 가족의 건강과 경제적 행복까지 더해지는 도시 농부가 되는 이야기, http://bit.ly/V9KONN 에서 함께 보실까요?
산하의 오역
1997년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그의 본명은 리일남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었다. 성은 두음법칙을 적용한 이씨가 됐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하라”는 뜻의 한영으로 했다.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사람이었고 1982년 스위스 유학 도중 남한으로 ‘귀순’ (북한도 종종 행했던 ‘납치’라는 사람도 있고 이한영본인은 “미국에 가기 위해 한국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한 뒤 그는 이한영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2월 15일 그의 아파트 계단에서 총을 맞고 죽는다. 범인은 두 명의 괴한이었다. 군사독재의 몇 안되는 은혜로 범죄조직조차 총기를 보유를 할지언정 사용할 경우 조직의 소멸을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일반 탈북자가 아니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것이다. 즉 김정일은 이한영의 이모부였다.
이 사건은 종종 영화 속 모티브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강호와 강동원이 나온 영화 <의형제>에서다. 영화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지만 이한영은 혼자 죽었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다. 아니 무슨 놈의 킬러가 귀신도 모르게 사람을 제거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웃들이 다 알만큼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같은 곳에서 총을 쏜단 말인가. 그리고 이한영이 ‘간첩’이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은 추후 번복됐고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들어진 25구경 권총은 무려 1백여 종류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한영의 행방이 심부름 센터에 의해 알려졌고 그 와중에 돈을 받고 그를 도와 준 경찰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공작원이라면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세상을 아주 잘 활용한 셈이다.
이 사건을 두고 나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의 주장을 들었다. 한 명은 장기수 영감님, 또 한 명은 탈북자, 또 한 명은 보안과 형사였다. 장기수 영감님에 따르면 이한영은 납치됐고 이용만 당하다가 이용 가치가 다하자 안기부가 해치운 것이라고 했고 보안과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북한 공작원이 한 짓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탈북자의 의견은 또 달랐다. “남북이 합작해서 죽여 버린 거임다. 이미 이한영 가는 북이 보기에는 웬수덩어리였고 남쪽에서 보자문 골칫덩어리였지요. 돈 달라 뭐 해 달라 요구조건도 많았고 책 내고 어쩌고 하는 것도 다 돈 벌자는 것이었지요. 북조선에서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정보기관들끼리 내통을 했갔지요. 맘대로 하라. 우리는 개의치 않갔다. 그러니 그리 대담하게 설친 거 아니갔슴까?”
안기부는 후일 체포된 부부간첩을 심문한 결과 이한영을 쏜 것은 ‘최순호’라는 이름의 공작원이 이끄는 공작조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후 최순호인지 누구인지 모를 한 명이 은행 CCTV에 희미하게 잡힌 것을 제외하면 한국 경찰과 정보기관은 사건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그리고 이한영은 길지 않은 생을 마치고 저승길로 떠났다.
그는 북한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었고, 오히려 남에서보다 북에서 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남을 택한 (또는 택함을 강요받은) 후 오히려 기대만큼 화려하지 못한 남한 생활의 팍팍함 속에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었다고 하니까. KBS 국제방송 러시아 담당 PD로 잘 지냈으면 별 일이 없었을 테고 예쁜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왕년에 잘나갔던 로열 패밀리의 버릇은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이한영 자신을 한탕에 눈 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당연히 사업은 연전연패였다. 핀치에 몰린 그가 한 행동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이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같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안기부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결심이었고 그의 바닥이었다.
사람이 바닥을 보이면 그 뒤에 오는 것은 공포다. 그는 북한의 이모부가 자신을 죽일지도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산하의 오역
1954년 2월 16일 마릴린 먼로 한국에 오다
그녀가 죽은 지도 반 세기가 지났지만 그래도 ‘세기의 섹스 심벌’이라면 그 이름이 빠지지 않으며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부여잡으며 웃는 그 장면은 지금은 하나의 전 설적인 순간이 되어 남아 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몇 편 본 적 없고 그녀가 죽고 한참 뒤에야 세상 빛을 본 처지이지만 마릴린 먼로의 이름은 까마득한 옛날 여배우 아닌 바로 그저께 돌아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밤에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질문에 ‘샤넬 넘버 파이브’라고 대답하여 질문하는 기자의 넋을 빼놨던 에피소드나 빨갱이로 몰린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여 남편이 양심을 걸고 매카시즘과 맞설 때 그 옆에 있었던 일이나, 케네디 형제들과의 염문이나 뭐 하여간 무궁무진한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4년 2월 16일에는 그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됐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프고 버려진 땅 중의 하나였던 한국에 그녀의 화려한 미소가 등장한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공식적으로 행했던 세 번의 결혼 가운데 첫 상대는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던 제임스 도어티였다. 그때는 마릴린 먼로도 아니었다. 노마 진 베이커라는 이름의 열 여섯 살 소녀였을 뿐.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지만 노마 진 베이커의 팔자는 그렇게 공장 노동자의 아내로 아이 낳고 남편 월급 아끼며 살아갈 깜냥이 아니었다. 배우를 꿈꾸던 그녀는 헐리웃으로 갔고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 있던 남편과는 이혼했다. 마릴린 먼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그녀는 일약 세기의 섹스 심벌로 두둥실 떠올랐고 두 번째 신랑은 첫 번째 신랑과는 대기권과 땅의 차이가 있는 전설적인 스타를 고른다. 메이저 리그의 스타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고 메이저 리그 MVP를 세 번씩이나 차지했으며 헤밍웨이의 고전 <노인과 바다>에도 등장하는 불세출의 스타. <노인과 바다>에서 “돌아오면 야구 얘기나 들려 주세요” 하는 꼬마에게 노인은 “양키즈가 이기게 마련이지.”라고 대답하고 꼬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라고 맞받자 노인은 “양키즈에는 대(大) 디마지오가 있지.”라고 호언을 하는 것이다. 하여간 뉴욕 양키즈가 자랑하는 스타 군단 가운데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정도를 제외하면 상석을 양보하지 않을 대단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순간 대스타 디마지오보다는 “먼로의 남편”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별이란 더 밝은 별 앞에서는 그 빛꼬리를 내리는 법
그들은 1954년 1월 14일 결혼했는데 “우리 결혼했어요”를 꼬리표에 매단 이 스타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것은 일본이었다. 초청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이었다고 한다. 미국과 사생결단을 치른지 10년도 안됐지만 일본은 이 거물 스타 커플의 일본 방문에 전국이 들썩였다. 그야말로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신혼을 즐기는 이 커플 앞에 미군 장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조 디마지오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지금도 한국에는 많은 미군들이 고생을 하면서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오신 김에 한국을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디마지오는 정중히 거절의 멘트를 날렸는데 이때 미군 장교의 반응은 불세출의 야구 스타를 한없는 엄지왕자로 만들고 말았다. “저는 부인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만.” ‘조 디마지오 부인’ 보다는 자신을 보면 자지러지며 환성을 내지를 병사들 앞의 마릴린 먼로를 더 선호했던 탓일까. 마릴린 먼로는 신혼여행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마릴린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이건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1954년 2월 16일 흡사 오늘날의 아프간 비슷했을 한국에 마릴린 먼로가 왔다. 국내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와 백성희가 나가 마중을 했고 미군의 하늘같은 장성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그녀가 왔다. 이후 그녀가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왔을 때 풍경을 보자. “미모의 여왕을 직접 눈앞에 보고자 비행장에 모여든 약 6백여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흥분된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
꿀꿀한 기분 날리자는 뜻의 옛 포스팅....
촬영하다보면 가끔 새벽부터 밤까지, 차량기지에서 나오는 첫차로부터 취객들이 널부러진 막차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지하철을 타며 촬영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캄캄한(?) 지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적응하다보면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펼치는 삶의 퍼득임들을 쉽게 발견합니다. "땅밑으로 다니지 않고는 약속을 지킬 수 없는" 현대인들의 바쁜 발걸음은 아침 저녁으로 지하에 일대 지진을 일으키고 가끔 몰래카메라에 포착되는 성 추행범들의 면면은 참으로 멀쩡하기 그지없습니다. 취객들의 노래 소리가 높으면 자리 찾는 아줌마들의 눈초리가 매섭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아저씨 곁에는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연인들의 애정 표현도 그칠 줄 모릅니다. 한쪽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지나가면 반드시 단돈 천원에 갖은 물건을 다 파는 아저씨가 뒤를 따르지요.
지하철을 그런 식으로 며칠 째 타고 다니던 어느 날 아침, 지칠 대로 지쳐 의자에 파묻혀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제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일 미인이었으면 오죽 좋았겠습니까만 그건 아니고, 자리 확보하느라 남산만한 엉덩이를 들이밀어 제 단잠을 깨운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주목하게 된 건 제 맞은 편에 앉았던 그녀의 행동이 기이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큼직한 여행 가방을 앞에 둔 그녀는 몇 번씩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거듭했습니다. 전철 처음 타는 시골 아주머니 행색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려야 할 역을 누구에게 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 큰 가방을 끌었다 밀었다 하며 일어섰다 앉았다 좌불안석을 거듭할 뿐이었지요.
잠시 뒤 그녀가 여행용 가방을 끌고 객차 가운데에 섰을 때, 그리고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저 외에는 그 누구의 귀도 끌어당길 수 없을 듯한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울렸습니다. "차 안에.... 여러분......."
그 목소리만큼이나 조심스런 동작으로 가방에서 수세미를 꺼내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당연하지만 무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종내 모기 소리를 좀체 키우지 못하다가 차량과 차량 사이로 숨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그녀의 짧은 호객(?) 행위 중에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객(?)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쓴웃음을 지었지요.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물건을 팔아 보겠다고 나오신 길에 저러면 쓰나......
가련한 아주머니가 깨문 입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둔 동안에도, 목청 좋고 얼굴 두꺼운 장사꾼들이 그 차 안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카메라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수출 판로가 막혀 헐값에 내놓은" 지갑을 파는 한 중년 신사의 우렁찬 호소로부터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지갑의 원단의 뛰어남과 제품의 효용성과 가격의 유리함을 소리 높여 외쳤고, 한 칸의 객차 안에서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만 원짜리를 내밀었습니다.
이 숙련된 조교 행상과 초보 올빼미 행상 아주머니의 극명한 대조에 약간의 흥미를 느끼고 지켜보는데, 올빼미 아줌마가 숨을 몇 번 고르더니 용기를 내는 눈치입니다. "차 안에 계신........ " 제법 목소리는 커졌습니다. 그러나 그 뒷말에서 저는 덜컥 나자빠지고 말았습니다. "차 안에 계신..... 수세미(?!%^$)......" 이 아줌마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의 배합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고, 결국 아줌마는 더욱 더 오그라든 채 제 시야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지하철 2호선을 세 번쯤 돌았을 즈음, 저는 삼성역에서 내렸습니다. 테잎을 가져오기로 한 조연출을 만나기로 한 장소였죠. 퀴퀴한 땅밑 냄새 그득한 벤치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건 아까 우렁찬 목소리고 지갑을 팔아 대던 행상의 목소리였지요. 장사할 때 뿐 아니라 평상시 목소리가 큰지 그의 목소리는 지하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머리를 벽으로부터 떼고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 것은 그 목소리 탓이 아니었습니다. 그 옆에
가카께서 퇴임 연설을 하셨다. 덕분에 방송 20분 줄었다. 끝까지 영향을 미치시는 그 성덕에 감읍하면서 5년 전을 추억해 본다. 딱 이맘 때... 취임직전에 'MB복음'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지금 돌이키니 거의 예언과 같다.... \직장 때려치우고 신학교에 가거나 미아리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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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께서 무리를 보시고 인왕산 기슭에 올라갈 준비하시니 인수위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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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종부세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양도세 낼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값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특목고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 터질 것임이요
대운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과거가 불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높은 자리를 볼 것임이요, 국보위 반석 위에 내 집을 지으리로다
영어 쓰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인재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李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대한민국이 저희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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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은 세상의 개똥이니 개똥이 만일 그 냄새를 잃으면 무엇으로 약에 쓰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 가난한 이들이 나의 빛이라 달동네 사람들이 나를 찍었음이요
그들이 제 임자를 알아보고 나를 묻지마 권좌에 올려 놓았나니 이러므로 내 힘이 나라 안 모든 사람에게 미치느니라
나의 힘이 대불공단 전봇대를 뽑듯 사람 앞에 들이대게 하며 너희 인수위의 삽질을 보고 그들이 뒤통수 맞았음을 깨닫게 하라
내가 가난이나 억울함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내 공약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청계천처럼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공약 중에 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차기 정부에서 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차기 정부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영어가 네이티브에 이르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사람이 말한 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능한 자는 시장의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와 나누고자 하는 자는 그 형제에게 밟히게 되고 착한 놈이라 하는 자는 경쟁의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또 수업 시간에 한국말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맘 속에서라도 한국말을 쓰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고스톱판에서 패를 잘 못 읽거든 빼어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돈 따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를 돈 잃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 가지 잃는 것보다 돈 잃는 것이 더 끔찍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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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가끔 신문 기사가 등장함이요. 땅으로도 마라. 이따금 동영상이 별안간 나타남이니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말을 스스로 뒤집기는 어려우니라.
가끔 뽀룩나면 너희는 오직 죽어도 아니라 아니라 하라 조금만 지나면 특검도 너희를 부를 수 없음이라.
또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약한 자 몫을 대신 내 주지 말라
내가 보험을 자유케 하고 보험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누구든지 네 오른편 지갑을 약자를 위해 빼내려거든 왼손으로 그 손을 칼로 치라.
네 쌈짓돈을 탐내는 자에게는 물구나무를
산하의 오역
1802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 태어나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바탕 ‘대선 멘붕 힐링 무비’로서 극장가를 쓸고 지나간 후 ‘레미제라블’의 완역본이 서점에서 각광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802년 2월 26일 그는 나폴레옹이 아직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과 왕당파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조합인데? 하고 갸우뚱할 필요 없다. 바로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의 출신성분이니까. 아버지는 아들 빅토르가 자신의 뒤를 잇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 아들은 나이 열 네 살 때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샤토브리앙은 그 작품보다는 그가 즐겨먹은 스테이크 이름으로 유명하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라고 들어나 봤나)
빅토르 위고는 그가 꿈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작가가 될 운명이었다. 원래는 왕당파적 성향이 있었지만 부르봉 왕조 최후의 왕인 샤를 10세의 정부에 의해 희곡 대본을 검열받고 무대 공연이 금지되자 점차 자유주의적인 쪽으로 그 성향이 변해 간다. 프랑스 자체도 격변이었다. 그가 ‘파리 드 노트르담’ 즉 노틀담의 꼽추를 쓸 때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불을 뿜어 부르봉 왕조가 막을 내렸고 ‘시민의 왕’ 루이 필립이 왕이 됐다. 후일 레미제라블의 주요 무대가 되는 이 1830년대에 위고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는데 그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의 애인이자 숭배자가 되는 여배우 줄리엣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서였다. 줄리엣은 이후 50년이 넘도록 위고의 반려자가 됐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위고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위고의 아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도 바람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위고가 바람만 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일으킨 봉기, 1832년 6월 봉기의 현장 근처에서 그 처참한 모습을 지켜 본다. 그가 열심히 희곡을 쓰고 있을 때 총소리가 난무했고 잠시 뒤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걸레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젊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신이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봉기가 끝난 후 아낙네들이 그 핏자국을 지우며 “그들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 텐데”는 어쩌면 그 현장에서 위고가 중얼거린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기획된 것은 1840년이었고 그로부터 위고는 근 20년 동안에 걸쳐 기획하고 저술하고 수정하고 다듬는다. 혁명과 반동, 전쟁과 폭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짓밟히고 외면되고 저버려졌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선인과 악인들의 파노라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개를 형성하고 뼈대를 갖춰 가게 된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위고의 코멘트 하나. “단테가 시로써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쩌면 <레미제라블>이 국적과 세월을 넘어 각광받는 이유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 지옥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굶어죽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야 하는 지옥, 그 지옥 앞에서 “자기 빵을 도둑 맞는 빵집 주인의 공포”를 걱정해야 한다고 우기는 어느 나라 일등신문의 칼럼이 칼춤을 추는 지옥.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고상한 문체와 어휘를 버렸다. 그래서 후일 작품이 완성된 후 사실주의 소설가 플로베르 등에 의해 저속하고 부정확한 단어를 썼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굳이 비교가 가능하다면 <태백산맥>의 그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번역도 없이!) 감당해야 했던 난감함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1848년 또 한 번의 혁명인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건설될 무렵에도 위고는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한림원 의원으로, 학파의 거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밀었고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공화국 대통령의 첫 손님으로서
산하의 오역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타오른 불꽃
‘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별명이었다. 1946년 10월의 민중봉기부터 대구 경북 지역의 좌익세는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한바탕 싹쓸이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 분위기는 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거니와 대구는 어디에 내놔도 그 반골 기질이 뒤지지 않는 고장이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하필이면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가서 급서하자 이승만에 반대하던 많은 국민들은 실의에 찼다. 신익희도 호남선에서 배를 쥐고 쓰러졌고 조봉암은 이승만이 죽여 버렸다. 그나마 야당의 거목이라 할 조병옥마저 저렇게 됐으니 어쩌면 이승만 박사란 양반은 어쩌면 운이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전직 가카를 우러러 그렇게 말하듯이. 그런데 희망은 작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여든을 넘었으니 아니할말로 어느 날 화장실 가다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통령에라도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다면 그래도 위안이 될 터였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치를 정권이 깨닫지 않을 리도 만무. 그들은 막대한 부정선거는 물론 치졸한 선거 개입에 나선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시내 고교들에 일제히 등교령이 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많았던 섬유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출근령이 전달됐다.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전날 토요일에 급작스럽게 단축수업을 실시하거나 조기퇴근을 시키더니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토요일은 자유당 대구 유세였고 일요일은 민주당 대구 유세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 유세장에 갈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놓으려는 정권의 얄팍한 술책.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는 찌질함의 극치는 그때의 이 대통령 정권도 마찬가지로 발휘했다.
경북고등학교는 갑자기 시험을 앞당겼고 대구상고에서는 난데없는 졸업식 송별회 연습이 거행됐다. 대구여고에서는 어설픈 무용대회가 펼쳐졌고 별안간 떨어진 소집령에 학생들이 반발하자 그럼 영화라도 보자고 애걸하는 곳도 있었다. 어떤 경북고등학교 재학생의 추억에 따르면 영화 단체 관람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서 영화 <철도원> (추억의 이탈리아 명화)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가운데 으뜸은 대구고등학교였다.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유달리 자연친화적이었던지 이 날 ‘토끼사냥’을 핑계로 제자들을 불러냈다. 몽둥이 하나씩 들고 산자락을 뛰어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한 정권의 행동에 학생들은 불똥이 튄 듯 분노한다. 이기 뭐고?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 손진흥 등 대구 시내 학교 대표 7-8명이 이대우 학생의 집에 모였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 않은 ‘고딩’들. 그러나 그들의 각오는 사뭇 비장했다. “이거 하고 나면 우리는 퇴학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낀데 감옥 갔다 와서 취직은 우예 하고 뭐하고 먹고 사노.” 그러던 그들은 뜻밖의 노래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유정천리’. (대구일보 김풍삼 고문 증언) “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즉 감옥도 가고 취직도 안되고 인생 조질 거 같으면 까짓거 두메 산골에 들어가 감자라도 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경상도 특유의 확인 구호도 있었으리라. “댔나?” “댔다!”
다음날 손진흥은 진창밭이 된 길을 자전거를 낑낑거리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시위 결정을 재확인했다. 교사들의 만류가 완강해 시위가 무산된 곳도 있었지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 진출에 성공했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
3,1절 맞이 작년 이야기 하나 ..... 이런 사람도 있었다.
태릉갈비가 왜 유명하며 홍릉갈비며 정릉갈비며 하는 상호들이 많을까. 그것은 왕릉이나 왕비릉에는 제사가 잦았던 바,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고기들이 젯상에 자주 올랐으므로 그 주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조리하는 법을 수이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수원갈비도 그렇다. 슬프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방문했고 항차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했던 정조의 존재 때문에 고기 구경할 일이 많았던지라 수원갈비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있으면 또한 따르는 것이 음주와 가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이 기생이었으리라. 수원에도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일제 통치가 시작된 이후 기생들은 권번이라는 조직에 편입되어 이른바 위생 검사부터 개인적 신상명세까지 행정적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위생검사 즉 성병검사가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검사처인 자혜병원은 정조의 위폐와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과 왕이 머물던 봉수당 자리였다.
"말하는 꽃"이라 불리우던 기생들이지만 하늘같이 받들던 옛날 임금님의 위패가 엄존하던 곳에 일본인 의사들이 진을 치고 기생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렸으리라. 수원 권번 소속 가운데 두번째 왕언니였고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고 기록된 스물 셋의 기생 김향화는 그 포한을 가슴 속 깊이 포개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원 일대의 술집은 문을 닫았고 기생이고 광대고 죄다 일손을 놓았다. 즉위한지 근 반세기, 망국의 황제일망정 격변을 함께 한 군주는 민중들에게 심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덕수궁 앞은 상복 입은 조선인들의 통곡으로 뒤덮였다. "우리도 올라가자! 황제폐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자." 김향화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들은 상복 입고 나무비녀 꽂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 덕수궁 앞에서 호곡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울음같은 만세소리가 폭발했고 그 폭음은 삼천리 방방골골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한 신문에는 한반도 남쪽의 유서깊은 도시에서 일어난 한 만세 시위 기사가 실렸다.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가장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용감하게 일어서는 이 나라의 희한한 역사 한 자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수원 기생들도 이 기사를 보았으리라.
3월29일은 수원 권번 소속 기생들의 검진일이었다. 기생 33명은 함께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기도 33명) 병원 가는 길에 기생들을 단속하고 못살게 굴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우는 애도 순사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태형(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행동을 벌인다. 그 정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이다. 장구에 맞춰 소리를 부르던, 술 사내들 속을 녹이던 그 간드러진 음성들은 칼날처럼 경찰서를 겨누며 수원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3월25일부터 수원 인근이 조용하지 않았었지만 기생들이 이러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제 경찰은 곧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10대의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다. 기생들의 독립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으랴. 얼마나 그 얼굴이 뜨거웠으랴.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 역시 잔학을 더했으니 수원 지역의 만세 시위는 4월의 제암리 학살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지만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징역 선고 기사 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본명이 순이였던 김향화가 이후 어떤 삶
벌써 일주일의 한 주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와 이번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한 주가 아쉽게 흘러갔다면,
이런 명언을 기억하시는건 어떨까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키케로'
모두들 즐거운 한 주 마무리 하세요! :)
지난 해 12월, 87년만에 복원 된 백두대간 이화령 구간 터널에서 첫 야생동물이 포착 되었습니다!
이번에 포착 된 야생동물은 '고라니'로, 정확히 12월 31일 17시 23분과 17:42분경 총 3마리의 고라니가 CCTV 화면에 촬영되었습니다.
이번 고라니의 이동은 그동안 단절된 이화령 구간의 생태계가 복원되기 시작했다는 실질적인 증거이며, 특히 불과 복원 한 달만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왔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더욱 소중하고 기쁜 것입니다. 자세한 소식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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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서울청사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구요? 오늘 미래의 꿈나무들이 청사에 방문해 선물도 받고 장학금도 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어찌나 기뻐하던지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었는데요.
아이들의 행복한 이야기, 블로그를 통해 확인해 보시죠~
http://mopasblog.net/11810758